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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남석광 南錫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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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남석광
한자명 南錫光
본 관 영양(英陽)
이 명 자 이박(而珀)
출신지 경상북도 청송(靑松)
생몰년월일 1881. 2. 22 ~ 1952. 1. 6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산남의진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6년 산남의진에 참여하고 1908년 서종락 부대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81년 2월 22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거성리(巨城里)에서 아버지 남경하(南敬夏)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자는 이박(而珀)이다. 1906년 3월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산남 의병부대는 을사늑약 이후 동엄(東嚴)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은 그의 아들 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가 향리 영천(永川)에서 주변 각 군의 의병을 규합하여 창의(倡義)한 의병부대이다. 청송 지역에서 영양 남씨 일족인 남석우(南錫佑)·남석인(南錫仁)·남석하(南錫夏)·남석구(南錫球)·남석술(南錫述)·남석우(南錫祐) 등 17명 중 한 명으로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5월 21일 신돌석 의병부대가 영해(寧海)에서 관군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하던 정용기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간계에 속아 붙잡히자 청송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8월 정용기가 재기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할 때 다시 참여하여 영천·청송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9월 20일 청송 안덕(安德)의 신성전투(新城戰鬪), 10월 1일 영천 자양전투(紫陽戰鬪), 10월 2일 영천 검단전투(檢丹戰鬪)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0월 7일(음) 9. 2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이한구(李漢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한 뒤, 아버지 정환직의 휘하에서 입암(立巖)·동대산(東臺山)·화장(花壯)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 해 12월 영덕전투(盈德戰鬪) 이후 대장 정환직이 청하면(淸河面) 각전(角田)에서 붙잡혀 사망하자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이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산남 의병부대는 소부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청송 지역은 주왕산(周王山)을 중심으로 청송읍(靑松邑)과 부동면(府東面), 그리고 부남면(府南面) 일원의 청송 동부 지역은 서종락부대(徐鍾洛部隊) 부대, 철령(鐵嶺) 일대의 청송 서부 지역은 남석구부대(南錫球部隊) 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때 1908년 2월 편성된 서종락 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종락 부대는 대장 서종락을 중심으로 중군 우영조(禹永祚), 소모장 윤용식(尹龍植), 군문집사 조경옥(趙景玉), 참모장 심일지(沈日之), 도총 오상영(吳相泳), 도포장 심지국(沈智國) 등으로 편성되었다.

 

1908년 10월 이후 서종락·김사곡(金舍谷)·윤상촌(尹裳村) 등 핵심적인 인물들이 붙잡히거나 귀순함으로써 청송 지역 의병부대는 점차 해체되어 갔다. 1910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에서 패한 뒤, 각처를 전전하며 은신 생활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참고문헌|

『자음선생문집』, 1938 ; 『산남창의지』 (上·下), 1946 ; 『영양남씨운강공파보』 1권 , 2003 ; 김희곤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청송군, 2004 ; 조인호 외, 『영천의 독립운동사』,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