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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진영 金震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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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진영
한자명 金震榮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자 : 중옥(重玉), 호 : 벽초(碧樵), 이명 : 김해영(金海榮)
출신지 경상북도 청송(靑松)
생몰년월일 1876 ~ 1921. 8. 23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6~1908년 정용기의 산남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의병 투쟁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7)

1876년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신성리(薪城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중옥(重玉), 호는 벽초(碧樵), 이명은 김해영(金海榮)이다. 1896년 청송의병부대[(靑松義陣)]의 중군장(中軍將) 김대락(金大洛)의 아들이다. 1907년 산남의병부대[(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산남의병부대는 1906년 (음)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일으킨 의병부대이다. 산남의병부대가 영해(寧海) 방면으로 진군하던 중 1906년 4월 경주진위대의 간계에 속아 대장 정용기가 경상감영으로 잡혀갔다. 그 뒤 정용기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풀려나면서 1907년 4월 재기할 수 있었다. 이때 장영집사(將營執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음)8월 25일 산남의병부대는 회의를 거쳐 9월 초 관동(關東)을 향하여 북상을 시작하였다. 정용기 대장은 본진 장졸 100여 명을 이끌고 진군하던 중 (음)9월 1일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巖)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밤을 새워 격전을 벌였으나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많은 장졸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니 이것이 입암전투이다.

 

1907년 (음)9월 3일 아버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남은 군사를 규합하여 진용을 재편성하였다. 이때 임창규(林昌圭)와 함께 군문집사(軍門執事)로 임명되었다. 의병부대는 청하(淸河)·흥해(興海)·청송(靑松)·영해(寧海)·영덕(盈德)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서울진공작전을 위한 북상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집요한 압박과 탄약마저 고갈된 상태에 처하여 대장은 개별적으로 북상하여 강원도에서 모이도록 지시하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그러나 정환직 대장마저 붙잡혀 1907년 (음)11월 영천 남교에서 총살 처형으로 사망하였다.

 

1908년 (음)2월 최세윤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여 부대가 재정비되었다. 이후 부대는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을 계획하였다. 지역별로 책임자를 선정하여 각지에 배치하고 소부대 규모의 유격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때부터 청송의 동부 주왕산(周王山) 일대에서 활동하는 서종락(徐鍾洛) 부대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최세윤 대장이 장기(長鬐) 용동(龍洞)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10월 부대장 서종락도 붙잡혔다. 남은 부대의 항전도 1910년 고와실(高臥室)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함께 활동하던 의병들이 잡히거나 귀순하던 상황에서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 이주 뒤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수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1년 8월 2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참고문헌|

『산남창의지』 (하), 1946 ; 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 『산남의진유사』, 19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권, 1970 ; 김희곤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2004 ; 박민영, 『한말 중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권대웅 외, 『경북독립운동사』 Ⅰ(의병항쟁), 경상북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