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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구찬회 具璨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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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구찬회
한자명 具璨會
본 관 능성(綾城)
이 명 자 : 찬옥(粲玉), 호 : 소봉(小峯)
출신지 경상북도 달성(達城)
생몰년월일 1890. 1. 27 ~ 1910. 5. 13
운동계열 계몽운동
관련 단체 척왜비사(斥倭秘社)
관련 사건  
주요 활동 항일결사 척왜비사 가입, 독립사상 고취 인쇄물 배포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90년 1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무태리(無台里)에서 아버지 구재서(具在書)와 어머니 인천 채씨(仁川 蔡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산면 무태리는 현 대구시 북구 서변동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으로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이다.

아버지 구재서(1860년생, 자 : 學三, 호 : 勿小齋)는 1907년 2월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문하에 들어가 문인(門人)이 되었다. 송병순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동생으로, 이 시기 충북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활산(活山)에 은거하며 강당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제자의 만류로 실패하였고, 1912년 일제의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고 일제에 항거하여 끝내 자결하였다.

독립운동가 이경희(李慶熙, 1890~1949, 호 池吾)와 구재서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구찬회의 아들 구자덕(具滋德)이 기록한 「애국지사 소봉유묵」(1976)에 의하면, 1906년 봄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융희학교(隆熙學校)로 전학하여 수학하였다. 학내에서 결성된 척왜비사(斥倭秘社)라는 항일 단체에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만주에서 활약하던 김동삼(金東三)이 국내 국민에게 보내온 포고문(布告文)을 김좌진(金佐鎭)이 맡아 인쇄물과 전단 등 일체를 위임하자, 이를 자필로 필사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1909년 12월 일제 헌병에 붙잡혀 6개월여의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1910년 5월 13일 서울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06년에 수학하였다는 융희학교는 설립 시기가 1908년 8월로 기록상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김동삼의 포고문이나 김좌진을 만나 인쇄물을 받아 배포하였다는 것은 구체적 자료가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생가지(生家趾)로 선대 구회신이 무태리로 입향한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던 능성세가(綾城世家)가 대구시 북구 서변동번지에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참고문헌|

구자덕, 「애국지사 소봉유묵」 ; 정휘창, 『항일독립운동사 : 대구·경북 편』, 중문출판사, 1991.
  • 구찬회
  • 「애국지사 소봉유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