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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윤희 金允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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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윤희
한자명 金允熙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동래(東萊)
생몰년월일 1888 ~ 1921. 5. 22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동래군 장안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4월 8일 동래군 장안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중남면(中南面) 교동리(校洞里,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결혼 후 본적을 동래군(東萊郡) 정관면(鼎冠面,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梅鶴里)로 이적하였다. 1919년 4월 8일 동래군 장안면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이후 기장면에서는 3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기장면에 사는 김수용이 정관면의 오해환(吳海煥)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 소식에 신두성(辛斗星)·김종복(金鐘復)·오진환(吳進煥)·정지모(鄭智模)·박일봉(朴一鳳) 등과 함께 김종복의 사랑방에서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4월 8일 장안면(長安面) 좌천리(佐川里) 장날로 정하였다.

 

4월 8일 주동인물들과 함께 조용산 산마루와 용산암에서 만세의거의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天祭)를 지내고 혈서구국의 맹세를 하였다. 이후 장안면 좌천리 시장에 모여 오후 1시 30분부터 2시까지 약 500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약 500명의 시위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일본 군경이 해산을 시도하며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정지모·오진환 등과 함께 붙잡혀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었다. 그러자 시위대가 좌천주재소를 포위하고 투석전을 벌이며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였다. 구출된 동지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좌천면에서 정관면으로 돌아오면서 계속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후유증으로 1921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22) [판형1]

 

⋮배석만⋮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5. 2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기장군지편찬위원회 편, 『기장군지』, 2001.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22)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