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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소 金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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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소
한자명 金沼
본 관  
이 명 김시준(金是濬)
출신지 평안북도 선천(宣川)
생몰년월일 1917. 2. 4 ~ 2008. 11. 8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한국광복군
관련 사건 서주대회전, 대별산작전
주요 활동 1935년 3월 황포군관학교 제8기 입학, 1937년 서주대회전 및 대별산작전 참전, 1943년 푸양 전방인 용갱 지역에서 독립중대장으로 근무하며 전선방어 임무와 광복군 활동 전개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애족장(1990)

1917년 2월 4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 인곡리(仁谷里)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김시준(金是濬)이었다. 아버지 김형균(金亨均)이 1919년 선천지역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가 중국의 리우저우(柳州)로 망명하여 병원을 운영하면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돕고 있었으므로, 11세 때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중국 리우저우로 이주하였다.

중국 리우저우에서 중국인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5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8기로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5월 중국국민혁명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서 장제스(蔣介石)가 설립하여 교장을 맡고 있던 사관학교였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했으므로, 황포군관학교 재학생 상급반은 단축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 국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37년 룽저우(龍洲) 하사관 교육대 구대장을 역임하고, 중국 국민군 제38사단 소속 소대장으로서 서주대회전(徐州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중국 중앙군 제11집단군 소속 소대장으로 대별산작전(大別山作戰)에 참전하여 한커우(漢口)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3년 중국 중앙군 제11집단군 직할 경비중대장으로 승진되어, 야전사령부에서 1개 독립중대를 인솔하고 푸양(阜陽) 전방인 용갱(龍坑)에 주둔하면서 전선 경비 방어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944년 2월 푸양 중국 중앙군 야전사령부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를 만나자,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광복군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 후 중국 중앙군 소속 독립경비중대장으로서 적 후방 최전선에서 경비 방어작전을 수행하면서 한국광복군에서 파견 나온 김국주(金國柱)와 협조하여 광복군 제3지대 공작요원들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일본군 탈출 한국인과 한인 청년들의 초모 공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소속은 중국 중앙군이었지만 활동은 한국광복군 장교와 유사한 활동을 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자 중국군을 정식 사임하고 귀국하여 서울을 거쳐 선천으로 귀향하였다. 북한에서 공산화가 진행되자 단신 월남하여 1947년 7월 육군사관학교에 제5기로 입학하였다. 6개월간의 단기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와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1948년 경교장을 찾아서 김구와 김학규를 만났다. 김학규 장군의 소개로 부인 김영기(金瑛基)를 만나 그해 결혼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참전하여 1952년 9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62년 9월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75년 파라과이로 이민갔다가 1992년 다시 귀국 후에는 광복군 제3지대 출신 친목모임인 ‘부양친목회’(阜陽親睦會)와 육군사관학교 제5기 출신 친목회인 오성회(五星會)에서 봉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신용하⋮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육군사관학교 편, 『陸軍士官學校第五期卒業記念寫眞帖』, 육군사관학교, 1948 ;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광복군 김문택 수기』 상·하, (주)신생커뮤니케이션, 2005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독립운동가의 삶과 회상』 1, 역사공간, 2012 ; 김영신, 「김소」, 2016.
  • 황포군관학교 옛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