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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선량 金善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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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선량
한자명 金善亮
본 관 김해(金海)
이 명
출신지 황해도 안악(安岳)
생몰년월일 1899. 12. 28 ~ 1984. 2. 18
운동계열 문화운동
관련 단체 흥사단, 화동한국학생연합회, 수양동맹회(수양동우회), 안악기독청년회
관련 사건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3.1운동 참여,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흥사단 가입, 1922년 화동한국학생연합회 활동, 1924년 수양동맹회 가입, 안악기독청년회 창립, 1928년 황해도 기자대회 참여, 1930년 전조선수재구제회 위원, 1936년 안악고등보통학교설립운동발기회 기본금 부원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99년 12월 28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읍내면(邑內面, 현 안악면) 훈련리(訓練里)에서 김용제(金庸濟)와 홍인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고향에서 안신소학교(安新小學校)를 졸업한 후 평안북도 선천(宣川)의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선천면에서 벌여진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선천의 만세 시위는 민족대표이자 선천북교회 목사 양전백(梁甸伯)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신성학교 교사 김지웅(金志雄)·홍성익(洪成益)·정상인(鄭尙仁) 등을 도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 시위 모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3월 1일 당일에는 시위에 가담하여 군청과 경찰서 앞 등 읍내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1920년 3월 신성학교 졸업 후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 머무르던 중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난징(南京)으로 떠나기 전까지 단원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1년 3월 난징 금릉대학(金陵大學) 부속 중학에 입학하였다. 이즈음 유학 중에도 민족운동에 가담하여 난징 지역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1922년 7월에는 화동한국학생연합회(華東韓國學生聯合會) 활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화동한국학생연합회는 장쑤(江蘇), 저장(浙江),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등지에서 유학하는 한인 학생들의 연합 조직으로 학생간 연락, 친목 도모, 신착(新着) 학생 환영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해 7월 7일 여름방학을 기하여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서 유학생 40여 명이 모여 화동한국학생연합회 연합대회를 개최할 때 의사부(議事部) 의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고향인 안악으로 돌아와 잡화점을 개설하고 과수원을 운영하였다. 1924년 봄 서울 이광수의 집에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에 가입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 안악지국장을 맡고 있을 때 발행권 분규가 일어나자 지국장 대표로 대책회의에 참석하여 사태 해결에 힘을 보탰다. 이 사건은 보천교(普天敎) 측에서 『시대일보』를 기관지화하려고 신문의 편집 및 발행권을 보천교 측 인물로 명의변경하며 일어났다. 7월 중순에 개최된 『시대일보』 지분국장회의에 참석하여 『시대일보』 편집 및 발행권을 시대일보사로 인도하고 이후 경영을 시대일보사(사우회 및 지분국장회)로 인도할 것 등을 결의하였고,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보천교 측과의 협상에 참여하였다.

안악기독청년회 창립에 관여하여 11월 30일 안악 읍내 예배당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에 김구(金九)의 모친 곽낙원(郭樂園)이 손자 김신(金信)을 데리고 귀국하자 안악으로 모시고 와서 보살폈다. 곽낙원이 다시 중국으로 떠나는 1934년까지 10년간 생계를 지원하였다.

1925년 5월에는 개벽사(開闢社) 안악분사 지사장을 맡았다.

1926년 수양동맹회가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와 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개칭되고 5월부터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간하기로 하자 발행자금으로 100원을 제공하였다.

1928년 12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서울에서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 등과 수양동우회의 약법 개정을 논의하였다. 단체의 세력 확장을 위해 약법에 정치 투쟁을 가미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정치 투쟁 가미를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1931년 2월 22일 서울 동광사(東光社)에서 이광수·박현환(朴賢煥)·김윤경(金允經)·주요한·김동원(金東元) 등과 만나 동우회 진흥책을 협의하였다. 이 회합에서 동우회 주최 하계수양회를 열어 주의와 강령을 선전하고, 장래의 혁명 동원을 준비하기 위하여 청년개척군(靑年開拓軍)을 조직할 것 등이 논의되었다. 같은 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1934년 1월 2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이광수·이용설(李容卨)·김동원·이영학(李英學)·장리욱(張利郁) 등과 만나 동우회 회원 증가, 회관 신축, 동맹 저축 실시 등 진흥책을 협의하였다.

1936년 5월 안악군 유지 50명이 안신보통학교에 모여 조직한 안악고등보통학교설립운동발기회(安岳高等普通學校設立運動發起會)의 발기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기본금 부원에 선임되었는데, 집안인 김씨 문중의 김용정(金庸鼎)·김용진(金庸震)·김홍량(金鴻亮) 등이 30만 원을 희사하였다.

1937년 5월에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주요 관련자들이 연이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1937년 11월 23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38년 3월 22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같은 해 7월 28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검사가 항소하였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명환⋮

|참고문헌|

「高秘 제27889호, 支那에 歸化한 朝鮮人에 관한 件」, 1921.9.21,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公信 제27호, 上海 및 南京在住 不逞鮮人의 有力者 氏名에 관한 件」, 1923.1.8,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鮮高秘乙 第659號, 上海ヨリ渡來 鮮人ニ關スル件」, 1922.9.1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內地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40.8.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2집, 1977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독립신문』 1922.7.15 ; 『동아일보』 1924.7.20, 1928.4.26·28, 1936.2.12 ; 『시대일보』 1924.12.15 ; 『조선일보』 1930.7.22, 1946.10.15 ; 『중앙일보』 1933.1.5 ; 『서울신문』 1946.1.1 ; 「高麗華東留學生聯合會의 出生과 그 由來」, 『개벽』 제24호, 1922.6.1 ; 「社告」, 『개벽』 제59호, 1925.5.1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1956 ; 주요한 편, 『안도산전서』, 196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8권,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이상규 외,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한국장로교총연합회, 2017 ; 윤은자, 「20세기 초 중국유학과 ‘金陵’의 한인 유학생(1912~1927)」, 『중국근현대사연구』 제6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