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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병연 金炳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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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병연
한자명 金炳淵
본 관  
이 명 창씨명 : 금성병연(金城炳淵)
출신지 평안남도 평양(平壤)
생몰년월일 1896. 2. 25 ~ 1965. 8. 17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철혈청년단, 조선노동동맹회(평양), 평양기독교청년회, 평양청년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평양지방부, 신간회 평양지회, 평양상공협회, 관서체육회, 동우구락부, 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동우회
관련 사건 동우회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철혈청년단 활동, 1920~30년대 평양지역 사회운동 주도, 1920~30년대 수양동맹회·수양동우회·동우회 활동으로 ‘동우회 사건’에 연루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96년 2월 25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상수리(上需里)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금성병연(金城炳淵)이다. 1912년 8월 5일 평양의 사립 의성학교(義成學校)를 졸업하였다. 1916년 4월 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조형식(趙亨植)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철혈청년단(鐵血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임시정부 선포문」, 각료 명단, 『청년단보(靑年團報)』 등을 비롯해 각종 인쇄물을 비밀리에 복제하여 배포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아 간도로 넘어가던 중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1920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포목상, 신문사 기자 등으로 생활하였다.

1922년 7월 중순경 평양부 창전리(倉田里) 동아일보사 평양지국 사무실에서 김동원(金東元)·김성업(金性業)·조명식(趙明植) 등 다수와 함께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1925년 11월 해산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창전리 김동원의 자택에서 결성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결사의 명칭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동우회(同友會)로 개칭된 뒤에도 계속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이광수(李光秀)가 안창호(安昌浩)로부터 흥사단(興士團)의 국내 지부를 조직하라는 명을 받고 조직한 것이었다. 여러 차례 회합을 통해 수양동우회의 약법(約法)에 안창호가 발안한 대공주의(大公主義)와 정치적 색채를 가미할 것, 지부(支部)를 설치하여 수양동우회를 확대 강화하는 문제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수양동우회 내에서 의견이 대립될 때 이견을 통일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9년 3월 2일 평양부 창전리 동명학관(東明學館)에서 김동원·조명식·김성업·오경숙(吳敬淑)·김항복(金恒福)·조종완(趙鍾完)·백응현(白應賢) 등 다수와 회합하여, 수양동우회는 장차 안창호가 조직할 혁명당의 한 부분이 될 것이므로 투사의 양성에 노력하며 그 취지에 공감하는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망라할 것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30년 11월 1일 평양고무판매소에서 위의 동지들과 회합하고, 동우회 기관지 『동광(東光)』의 속간(續刊)을 위해 각 지부에서 6,000원을 분담하기로 협의하였다. 1932년 7월 2일 평양상공협회 회관에서 동지들과 “동우회와 기독교는 서로 합치되는 점이 많으므로 기독교도와 연결하여 동우회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기로 협의하였다. 1933년 2월 1일에는 동우회 평양지방회관 설치에 관해 협의하고, 이후 회관을 건립하였다. 1935년 2월 2일 평양지방회관에서 회합하여 동우회 약법에 있는 이른바 ‘경제 협동’에 대한 구체화의 일환으로 동맹 저금 실시에 관해 협의하였다.

김병연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앞면(국사편찬위원회) [판형2]

1920년대 이래 평양에서 청년단체, 언론사 등을 통해 사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1923년 4월 15일 평양에서 조선노동동맹회(朝鮮勞動同盟會) 창립에 참여하고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24일 평양기독교청년회(平壤基督敎靑年會) 교육부장으로, 6월 19일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평양지방부의 상무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 31일 평양청년회(平壤靑年會) 서기로, 1925년 10월 29일 평양청년회 문예부 책임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0년대 이래 평양에서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 및 지국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24년 『평양일보』 평양지국장, 1926년 『중외일보』 평양지국장을 역임하였다. 1925년 4월 24일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全朝鮮記者大會)에 참석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평양지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불온’ 선전물 관계로 평양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28년 1월 10일 조만식(曺晩植) 등 10명과 함께 서울에서 열릴 신간회 대회에 파견할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9월 신간회 평양지회 집행위원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이후 선전조직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30일 신간회 평양지회 집행위원회에서 최윤옥(崔允鈺)·김성업·김유창(金裕昌)·조종완 등과 함께 평안남도연합회 창립을 위한 조직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0년 5월 10일 평양의 각 사회단체 연합으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의 사회장을 치르기로 함에 따라 그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초반 평양상공협회(平壤商工協會) 전무이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고무공장이나 피혁공장의 노동쟁의를 조정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1931년 4월 10일 조만식을 이사장으로 창립된 관서협동조합경리사(關西協同組合經理社)의 전무이사로 활동하였다. 1932년 11월 이래 『조선일보』 평양지국장을 역임하였다. 이 외에도 조만식을 회장으로 한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에서 총무,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평안남·북도의 각종 스포츠 대회 등을 주관하다가, 1937년 9월 조만식의 회장 사임과 함께 부회장직을 사임하였다. 1936년 5월 22일 조만식·최윤옥·김성업 등과 함께 을지문덕묘산수보회(乙支文德墓山守保會)를 창립하였다.

1937년 6월 16일 이른바 ‘동우회(同友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겪던 중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검사가 항소를 제기하여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를 제기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무죄가 나올 때까지 4년이 넘는 기간을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겪었다. 출옥 이후 1942년에는 금광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40.8.21 ; 「판결문」, 고등법원, 1941.7.21 ; 「전조선기자대회의 건」, 1925.4.17, 『檢察事務에 關한 記錄 1』 ; 『조선일보』 1923.4.19, 1930.5.13 ; 『동아일보』 1923.6.4, 6.26, 1924.11.2, 1925.11.4, 1927.12.24, 1928.1.13, 1929.9.24, 12.3, 1931.1.25, 4.14, 1934. 1.10, 1936.5.20, 5.24, 1937.9.11, 1949.1.9, 11.14, 1965.2.23 ; 『경향신문』 1948.8.7 ; 『대동신문』 1949. 2.18 ; 『민주신보』 1950.9.3 ; 『부산일보』 1950.9.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권,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권, 1977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김병연 프로필 사진
  • 김병연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앞면(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