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문택 金文澤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문택
한자명 金文澤
본 관

영광(靈光)

이 명  
출신지 평남 진남포(鎭南浦)
생몰년월일 1919. 12. 29 ~ 1988. 1. 8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한국광복군 제3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에서 복무하다가 탈출하여 1945년 1월 중국 안후이성 푸양(阜陽)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제1분대장 겸 훈련교관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22년 12월 29일 평안남도(平安南道) 진남포(鎭南浦)에서 아버지 김정선(金日+正善)과 어머니 임당유(林堂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출신인 김정선은 진남포 억량기교회 장로로, 평남 안주 사립소학교 교장을 지내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고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진남포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이러한 아버지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1943년 일본 도쿄(東京)의 주오대학(中央大學)에 다니던 중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에 다니러 왔을 때 일생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일을 겪게 되었다. 고향 청년들과 주민들에게 반일 연설을 하였고,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과 폭행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어머니가 나서 백방으로 석방을 교섭하였는데, 학도병에 지원하는 조건으로 1943년 12월 풀려났다. 이후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깊게 갖게 되었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944년 1월 서울에서 학병(學兵)에 강제 징집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큐슈(九州) 구마모토사단(熊本師團) 서부 제17부대에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인근의 기와키(木脇) 부대로 배속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중 1944년 9월 26일 외출일을 이용하여 동지 장두성(張斗星)과 함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였다. 진남포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듣게 되었고, 여기에 참여하겠다는 목표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일본군을 탈출한 후 ‘밀항선’을 이용하여 대한해협을 건너 경상남도 통영 앞바다에 내렸다. 다시 마산에서 밀양까지 걸어서 이동하였다가, 기차로 서울역에 내려 장두성과 헤어졌다. 평양을 지나 진남포 교외에서 아버지를 만나 여비를 얻어 혼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찾아가는 길을 쉽게 찾지 못하고 투먼(圖們)·훈춘(琿春)·목단강·하얼빈 등지를 맴돌다가 두만강을 두 번이나 왕복하였다. 마침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北京)-지난(濟南)-쉬저우(徐州)를 거쳐 1945년 1월 10일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의 싼타지(三塔集)에 도착하였다. 싼타지에는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이 있었다. 일본군에서 탈출한지 106일이 걸려 2만리가 넘는 장정(長征) 끝에 광복군에 합류한 것이다. 학병으로 일본 본토에서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유일한 경우이다.

탈출로 전도 [판형1]

 

김문택 친필 원고(1.10일 밤) [판형2]

한국광복군은 일본군 점령지역인 푸양에 김학규(金學奎)를 주임으로 한 징모(徵募) 제6분처를 설치하고 일본 군대에서 탈출하는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된 학병들이 잇달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 갔다, 당시 푸양에는 한성수(韓聖洙)·윤영무·(尹永茂)·김우전(金祐銓)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제3지대 분대장에 임명되어 이들과 함께 대원들을 교육하고 체제 정비에 힘을 쏟았다.

1945년 초순이 지나면서 적극적인 초모 공작과 선전 활동으로 신입 대원들이 늘어나자 훈련교관을 맡아 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기고 우리말로 된 훈련 교재도 직접 편찬, 사용하였다. 중국군이나 일본군이 사용하던 교육 훈련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는데,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우리말로 고친 것이다. 그때 새롭게 만든 ‘차렷’, ‘앞으로 가’ 등의 구호는 현재 국군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1945년 3월 징모 제6분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인준을 받아 제3지대로 편제되었다. 김학규 지대장이 푸양에 도착하면서 그해 6월 30일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훈련교관 겸 제1구대 제1분대 분대장에 정식 임명되었고, 참령(參領, 현 소령) 계급을 받았다. 김학규 지대장으로부터 미국 OSS와 한반도 침투를 위한 작전에 참여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고사하였다. 지대장의 지시로 OSS 파견 요원 선발과 훈련을 전담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 경축전례 기념사진(1945. 8. 30) [판형2]

1945년 8월 10일 훈련 도중 일제의 패망 소식을 처음 접하였고, 8월 15일 중국군 장교로부터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전해 들었다. 이후 일본군에서 복무하던 한적 사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교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 각지에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파견할 때, 제3지대 본부 간부로서 이들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6년 초 중국의 국공내전 심화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그 해 4월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학병 탈출 과정과 광복군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으나 소실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광복군 제3지대 동지들과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광복군 제3지대사’ 편찬하였다. 이들 자료는 후손이 학병 탈출기와 함께 2002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고, 2005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두 권의 자료집으로 간행하였다.

김문택 친필 원고 [판형3]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엽⋮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김문택, 󰡔새벽으로 가는 길- 광복군 수기󰡕,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5 ; 김문택, 󰡔광복군 김문택 수기 上 - 탈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 김문택, 󰡔광복군 김문택 수기 下 - 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 오산백년사편찬위원회, 󰡔오산백년사󰡕, 학교법인 오산학원, 2007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탈출로 전도
  • 김문택 친필 원고(1.10일 밤)
  •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 경축전례 기념사진(1945. 8. 30)
  • 김문택 친필 원고
  • 김문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