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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명천 金明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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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명천
한자명 金明天
본 관 김해
이 명 자:인전(仁前)
출신지 함경북도 회령(會寧)
생몰년월일 1916. 9. 11 ~ 1999. 7. 22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관련 사건 광복군 제2지대 대원
주요 활동 만주사변 후 한·중 연합군 소속으로 활동한 다음, 광복군에 합류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16년 9월 11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용흥면(龍興面) 신흥동(新興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인전(仁前)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3살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부득이 만주 펑톈성(奉天省) 시펑현(西豊縣)으로 이주하였고, 철령육영학교(鐵嶺育英學校)와 하얼빈(哈爾濱)의 고중(高中,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북만주 지린성(吉林省) 동북항일군 독립단 무술대에서 종군하였다. 당시 일본군 점령 지역인 이란현(依蘭縣) 이도하자(二道河子) 탈환 작전에 참전하여 대도회(大刀會)·홍창회(紅槍會)가 백병전으로 일본군 주력부대를 격멸하여 항일 연합군 철수 진로를 개척하는 데 참여하였다. 한편 일제는 각지에서 봉기하는 중국인 의용군을 토벌하려고 중국 동북 각지에 관동군을 분산 배치하여 직접 만주국군을 지휘한 결과, 중국 항일의용군은 큰 타격을 받았고 항일 투쟁의 기세도 한풀 꺾이게 되었다.

1932년 12월 만주의 주요 거점 지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됨에 따라, 소속된 한·중 연합군부대와 함께 소·만 국경지역의 미산(密山)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소·만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이동하여, 1933년 2월 러시아령 두으므스크에 이르러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무렵, 지린성장(吉林省長) 리두(李杜)의 자위군 및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마잔산(馬占山) 부대와도 조우하였다. 같은 해 5월 중국 서북 지역의 신장성(新疆省)에 도착하여 동북항일구국군은 신장변방군으로 재편되어 군사훈련과 후방 치안 유지에 힘쓰면서 지방민의 반란 폭동 진압작전에도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

1939년 5월 신장성의 중국중앙군관학교 제9분교에 입교하여, 1940년 10월 제3기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한편 1944년 11월 광복군 제2지대 공작조의 일원인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이 중국군 제34집단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타이항산 적후 공작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산시성(山西省)·허베이성(河北省) 등지에서 초모 활동招募活動 및 지하 활동을 통해 적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군 점령지구에서의 초모 활동을 통해 전성윤·최창모·윤치원·김두환·박승렬·최복련·김선옥 등의 탈출을 도왔다. 이때 시안(西安)으로 와서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에 편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병기⋮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편찬위원회, 『대한독립항일투쟁총사』 하권, 1989.
  • 김명천(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