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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삼도 金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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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삼도
한자명 金三道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高靈)
생몰년월일 1900. 9. 3 ~ 1967. 6. 2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 만세운동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2), 대통령표창(1992)

1900년 9월 3일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덕곡면(德谷面) 후암리(後岩里)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당시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재학 중 교사 백남채(白南埰)의 권유로 학생 대표로서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대구의 남성동(南城洞)교회 목사 이만집(李萬集)은 2월 24~25일경 이갑성(李甲城)으로부터 서울의 만세 시위 계획 소식을 접하고 대구에서의 만세 시위 성공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러던 중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후 대구의 기독교계 유지인 남성동교회 집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장로 겸 남산동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서문시장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각자 지역 주민과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대구성경학교 등 대구지역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파하여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계성학교 학생 대표 중 한 명으로서 이만집이 기초하고 김태련이 등사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전달받아 계성학교 재학생들과 거사 당일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거사 당일인 3월 8일 오후 3시가 되자 주도자들과 함께 서문시장에 모인 수많은 군중을 향해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과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지역 대표인 이만집이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학생들과 주민 등 700~800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일제경찰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 앞 삼각지까지 시위행진하였다.

이후 일제에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이 다시 선고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참고문헌|

「판결문(이만집 외 75인)」, 대구지방법원, 1919.4.18 ; 「판결문(이만집 외 45인)」, 대구복심법원, 1919.5.31 ; 「판결문(이만집 외 17인)」, 고등법원, 1919.7.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