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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두현 金斗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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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두현
한자명 金斗鉉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남도 하동(河東)
생몰년월일 1894. 4. 7 ~ 미상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관련 사건 군자금 모집
주요 활동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제2차 3.1운동을 위한 『독립신문』등의 배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18)

1894년 4월 7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적량면(赤良面) 우계리(牛溪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각지의 부호(富豪)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해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1919년 9월 박경선(朴慶善)에게 50전짜리 은화의 표면에 ‘태극기(太極旗)·독립기념(獨立紀念)’과 이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이란 글귀를 각각 새긴 큰 은메달 1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제작한 은메달을 가지고 고광욱(高光郁)·이근이(李根伊)와 함께 하동군 북천면(北川面) 방화리(芳華里)의 부호 이도식(李道植)을 찾아가 자신을 임시정부원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은메달을 보여주며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3일 이내에 하동으로 가져오라고 하면서 여비로 10원을 수취하였다.

김두현 제2차 독립운동 계획 관련 기사(『매일신보』 1921.5.14) [판형3]

이후 9월 중에 군자금 모집과 제2차 3·1운동을 벌일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경남 통영군(統營郡)의 김두옥(金斗玉)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고, 함께 부산부(釜山府) 좌천동(佐川洞) 오재영(吳哉泳)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리고 오재영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윤태선(尹台善)에게 받은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도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와 「유고문(諭告文)」을 건네받아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3·1운동에 이어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과 「경고문(警告文)」을 받아 배포하였다. 이들은 10월 1일에 제2차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함께 노력하였다.

김두옥 등과 함께 경상남도 각지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다가 1921년 5월 초순경 동지 12명과 함께 경상남도 경찰부 및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항소를 포기하고 진주분감에서 옥고를 겪다 4월 15일에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30년 경남 진주군 진주면(晋州面) 평안동(平安洞)으로 전적(轉籍)하여 생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참고문헌|

「身分帳指紋原紙」, 警察廳 ; 金正明 편, 『朝鮮獨立運動』 第1卷 分冊, 1967 ; 『동아일보』 1921.5.14, 6.2, 6.3, 6.18 ; 『매일신보』 1921.5.14 ; 『조선일보』 1921.5.21 ; 『독립신문』 1921.5.31 ; 「朝鮮獨立運動者 檢擧(陸軍省 : 1921.5.12)」, 『朝鮮騷擾關係書類(1921.5.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김두현 제2차 독립운동 계획 관련 기사(『매일신보』 192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