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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덕남 金德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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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덕남
한자명 金德男
본 관  
이 명 김성천(金成川), 천촌덕남(川村德男)
출신지 경상남도 울산(蔚山)
생몰년월일 1919. 10. 4 ~ 1946. 12. 31
운동계열 일본방면
관련 단체 조선독립혈맹
관련 사건 조선독립혈맹
주요 활동 1940년 일본 교토에서 비밀결사 조선독립혈맹(朝鮮獨立血盟)에 참가, 국내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8)

1919년 10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농소면(農所面) 창평리(倉坪里, 현 울산광역시 북구 창평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성천(金成川) 이다. 일제말기에는 일본식 성명강요로 천촌덕남(川村德男)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34년 11월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노동자로 생활하며 민족 차별을 겪고 한인을 대하는 모욕적 태도에 분노하며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교토(京都)의 다이와철공소(大和鐵工所)에서 일하던 중, 1940년 6~7월 경 동료 직공 김두만(金斗萬)에게 민족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같은 해 8월 이후 동료 직공 유귀복(柳貴福)을 주축으로 하는 비밀결사에 합류하였다.

1940년 9월 다이와철공소 내에서 유귀복·김두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결심하는 내용의 「서서(誓書)」와 「불변서(不變書)」를 작성하였다. 서서에는 일신일가(一身一家)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빨리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결심을 천신(天神)과 산신(山神) 앞에 맹세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불변서에는 그 의지가 변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였다. 서서와 불변서에는 손가락을 베고 피로 지장을 찍었다.

이들은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독립을 달성해야 하며,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므로 동지를 모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활동 거점을 국내에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백두산에 근거지를 만들 준비를 시작하였다. 옷 등을 팔아서 백두산 입산에 필요한 자금을 함께 모았다. 태극기를 만들 흰 천과 약, 등산용 칼, 수첩, 지도 등을 구입하였다. 자급자족 생활을 위한 취사도구와 쌀, 보리 등의 종자도 준비하였다.

1940년 9월 중순 김두만이 먼저 국내로 출발하였다. 출발 직전 유귀복과 함께 교토역 앞 음식점에서 모여 성공을 기원하며 배웅하였다.

2주 후에 국내로 들어왔다. 유귀복 또한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김두만의 본적지인 경남 의령에 모여 20일 간 체류하며 백두산 입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실행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교토와 오사카(大阪), 고베(神戸)로 흩어질 때, 교토로 갔다.

1941년 5월 16일 김두만이 혈맹한 서서를 가지고 있다가 오사카에서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다음 날인 5월 17일 교토에서 체포되었다. 1941년 10월 16일 오사카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2년 9월 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지현⋮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3 재일본한국인민족운동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Ⅲ : 民族主義運動編』, 東京: 原書房, 1967 ; 明石博隆·松浦総三 編, 『昭和特高彈壓史』 7, 東京: 太平出版社, 1975.
  • 김덕남 프로필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