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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길 金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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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길
한자명 金永吉
본 관 김해(金海)
이 명 김천가영(金天佳永)
출신지 경상북도 영천(永川)
생몰년월일 1924. 11. 12 ~ 1962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독립당(獨立黨), 백의사(白衣社)
관련 사건 영천‧대구 신사 방화 사건, 일본군 24부대 병기고 폭파 사건
주요 활동 1943년 영천‧대구 신사 방화 시도,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 세균 투입, 대구 시내 관공서에 태극기 게양, 일본군 24부대 병기고 폭파 기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24년 11월 12일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城內洞)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북 영천군(永川郡) 금호면(琴湖面) 봉죽리(鳳竹里) 83번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창씨개명에 의해 김천가영(金天佳永)을 사용하였다.

 

1942년 중국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귀국한 대구 출신의 박기수(朴基秀)와 경북 경산 출신의 박만선(朴晩善)을 만나 영천 교촌동(校村洞) 출신의 이영환(李榮還)·이상진(李相鎭) 등 6명의 청년들과 함께 비밀결사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하였다. 박기수는 일본 유학생으로 오사카부립공과학교(大阪府立工科學校) 야간부에 재학 중이던 1939년 3월, 동포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기공창(機工廠)의 제조 품목을 탐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1943년 4월 박기수·박만선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영천 교촌동 이영환의 집에 모여 영천향교(永川鄕校) 옆 사방대(四坊臺) 중턱에 위치한 영천 신사(永川神社) 방화를 계획하였다. 이영환 을 비롯한 4명과 함께 신사로 가서 벽 판지를 헐고 그 안쪽에 종이쪽들을 흩어 놓고는 촛불을 붙여 방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마침 순찰 중이던 일제 경찰이 이를 발견하여 진화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서 대구 신사(大邱神社)에 방화하였으나 다시 실패하였다.

 

1943년 5월에는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 맨홀 안에 세균(細菌)을 투입하였다. 그 외에 야간을 이용해 대구 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각처에 일본군의 패전과 광복군의 활동을 담은 전단을 제작하여 살포하였다. 1943년 7월 14일 대구 주둔 일본군 제24부대의 탄약고 폭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동지를 가장했던 헌병보 박천만(朴千萬)의 밀고로 1944년 8월 23일부터 대구헌병대에 의해 관련자 전원이 붙잡혔다.

 

1945년 5월 18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 방화 예비로 기소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받았다. 함께 활동하다가 붙잡힌 박만선은 징역 7년, 이영환은 징역 5년, 그리고 박기수는 징역 4년을 각각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참고문헌|

「수형인명부」, 대구지방법원, 1945. 5. 18 ; 영천시 문화공보실, 『영천의 전통』, 1988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경북독립운동사-1920~40년대 국내 항일투쟁』 Ⅴ, 경상북도, 2014 ; 조인호 외, 『영천의 독립운동사』,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