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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관 金榮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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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관
한자명 金榮觀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기도 포천(抱川)
생몰년월일 1924 ~ 생존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44년 일본군 탈출 후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제1지대 제2구대에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24년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영중면(永中面)에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재학중 1944년 9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중국에 주둔하다가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함경북도 함흥으로 징집되어 가는 길에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없다. 중국으로 배치 받으면 탈출해 임시정부로 갈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일본군 요코이(橫井) 부대에 배속되었지만 늘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광복군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요코이 부대가 1944년 10월 중국 저장성(浙江省) 이우현(義烏縣)에 주둔할 때, 동지인 김권(金權), 박승유(朴勝裕), 신의철(申義澈), 이희화(李熙和) 등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하여 1945년 1월 한국광복군 징모(徵募) 제3분처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정식 배치되었다.

 

광복군 징모 제3분처는 일찍이 한중합작으로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 닌핑(南平) 등지에서 대일 항전 활동을 하던 부대로 1944년 봄부터는 본부를 장시성(江西省) 예산현(鉛山縣) 허커우진(河口鎭)으로 옮겨 김문호(金文鎬), 신정숙(申貞淑) 등의 주도로 중국군 제3전구 내에서 중국유격대와 합동으로 정보, 선전, 공작을 전개하였다. 특히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여 일선 및 후방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광복군 합류 이후 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 난징(南京)지구 등 일본군 부대에 한국인 사병이 다수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우시 방면에 파견되어 광복군 초모(招募) 공작에 주력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동안 중국에서 한인교포의 생명 보호와 안전 귀국에 힘쓰다가 1946년 3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초심을 지키기 위해 자진 입대하여 전쟁을 치른 뒤 육군 대위로 예편하였다. 이후 철도청 차장, 홍익회 회장,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훈련 사진 [판형1]

 

⋮조재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훈련 사진
  •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훈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