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종 金永鍾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영종
한자명 金永鍾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昌原)
생몰년월일 1890. 3. 17 ~ 1950. 8. 15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창원군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진북면·진전면에서 연합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함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9)

1890년 3월 17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 진전면(鎭田面) 근곡리(斤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진전면 근곡리 구장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진북면·진전면 등의 주민들이 모여 함께 거행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는 1919년 만세운동 가운데 4대 만세시위 중 하나로 평가되며, 삼진만세시위라고도 불린다.

 

1919년 3월 28일 창원군 진동면 고현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한 변상태(卞相泰)·변상헌(卞相憲)·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 주도인물들은 일단 피신하여 비밀리에 2차 의거를 도모하였다. 음력 삼월 삼짇날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良村里) 냇가에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면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2일 을치리(栗峙里) 김순삼(金順三)의 집을 방문했다가 4월 3일의 만세시위 참가를 권유하러 온 권태용을 만났다. 이에 시위 참가를 약속하니 권태용은 4월 3일 만세시위에 동리 사람들을 동원해 줄 것과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집에서 김한봉, 김원종 등과 만나 함께 독립운동 참가를 논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고, 시위 당일인 3일 김봉조 외 29명을 인솔하고 시위장소인 양촌리 냇가로 집결하였다.

 

진천면 양촌리 냇가에 큰 태극기가 세워지자 3면(面)의 주민들이 운집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11시경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시위대 1,500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촌리로부터 진동면(鎭東面)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진전면에서 행진해 오는 시위대를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대는 약 5,000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경 시위대가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재향군인 30여 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 경계원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대항하여 맨몸으로 싸웠다.

 

오후 3시 무렵 마산에서 증파된 일본군 야포대대가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8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시위대도 해산당하였다. 이때 주도 인물 3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의 재판 이후 재판권 관할문제로 오랫동안 구류되어 있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사동교 3.1운동 만세시위지(경남 창원) [판형1]

 

 

판결문(부산지방법원 1919. 11. 6) [판형1]

 

⋮배석만⋮

|참고문헌|

「판결문(권영대 외 8인)」, 부산지방법원, 1919. 11. 6 ; 「판결문(변상태 외 9인)」, 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 「판결문(변상태 외 9인」, 경성지방법원, 1921. 8. 7 ; 「판결문(권영대)」, 경성복심법원, 1921. 2. 2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마산시사편찬위원회, 『마산시사』, 2011.
  • 사동교 3.1운동 만세시위지(경남 창원)
  • 판결문(부산지방법원 1919. 11. 6)
  • 판결문(부산지방법원 1919.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