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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서 金永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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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서
한자명 金永瑞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남도 부산(釜山)
생몰년월일 1882. 11. 23 ~ 1975. 12. 1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 시장정의 서문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함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82년 11월 23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좌천동(座川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남산정(南山町)에서 거주하며, 계성학교(啓聖學校, 現 계성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종교는 기독교이고, 신정교회의 장로도 역임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구의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24~25일경 경상도의 만세운동 연락책임자이던 이갑성(李甲城)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대구 남성동(南城洞) 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集)과 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이 주도하였다. 이후 3월 2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이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만세운동의 경과를 목도하고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계획되었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이만집의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대구의 기독교계 유지인 남성동교회 집사 김태련·이상백·백남채·권의윤(權義允)·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서문시장의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 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협의하였다. 또한 각자 지역 주민과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現)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現) 신명고등학교)·대구 성경학교(聖經學校) 등 대구지역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파하고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이때 계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성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시위운동 동원과 기독교 계통 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당시 대구지역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러 학생대표로 대구에 와있었던 평양(平壤) 숭실학교(崇實學校)학생인 김무생(金武生)을 만나 대구지역 각급 학교 학생집단의 조직화와 시위 참여 독려에 나섰다. 김무생과 함께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허범(許範)·백기만(白基萬)·신현욱(申鉉旭)등을 차례로 만나 서울과 평양에서 학생단 주도로 거행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대구지역의 각급 학교 학생들의 연합세력 형성을 권고하였다.

 

또한 대구의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김천(金泉)에서 온 예수교회 전도사 박제원(朴齊元)과 함께 신명여학교 교사인 임봉선(林鳳善)을 만나 서울과 평양에서 거행된 학생단의 독립만세시위운동에서 두드러진 여학생들의 역할과 활약상을 전하면서, 신명여학교의 학생들 또한 서울과 평양의 여학생들처럼 적극적으로 시위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외에도 기독교 계통의 성경학교에도 연락해 연합시위에 가세할 것을 약속받았다.

 

만세시위 당일인 3월 8일, 대구 시내는 아침 일찍부터 도청 정문 등 시내 각 요소마다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다. 예정 시각인 오후 3시가 되자 서문시장에 모인 수많은 군중을 향해 이만집이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면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주도자를 비롯한 700~800여 명의 시위 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일제 경찰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까지 행진을 하였다. 이때 지역 기독교 유지의 대표로 수많은 학생과 군중들을 선두에서 이끌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행진하던 시위대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80연대 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탄압과 구타에 의해 다수가 붙잡히면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4.18) [판형1]

 

⋮홍종욱⋮

|참고문헌|

「판결문(이만집 외 75인)」, 대구지방법원, 1919. 4. 18 ; 「판결문(이만집 외 45인)」, 대구복심법원, 1919. 5. 31 ; 「판결문(이만집 외 17인)」, 고등법원, 1919. 7. 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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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서(프로필사진)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4.18)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