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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병덕 權秉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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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병덕
한자명 權秉悳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자 윤좌(潤佐), 호 청암(淸菴), 정암(貞菴), 우운(又雲)
출신지 충북 청주(淸州)
생몰년월일 1868. 4. 25 ~ 1943. 7. 1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85년 동학 입교, 1894년 동학농민운동 참가, 1915년 중앙시천교회본부 창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천도교)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1868년 4월 25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성화동(聖化洞, 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부친 권문영(權文永)과 모친 신문화(申文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윤좌(潤佐)이며, 호는 우운(又雲), 도호(道號)는 청암(淸菴)·정암(貞菴) 등이 있다. 선대는 경북에서 살아 증조부모와 조모의 묘는 경북 문경군 호계면에 있고, 조부의 묘는 경북 상주군 화서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출생 시기에 경북 상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가는 청주 일원에 대대로 살아온 고령 신씨(氏)로서 당시 관례에 따라 외가인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에서 태어났고, 얼마 후 다시 상주 본가로 돌아갔다.

상주에서 종숙에게 『동몽선습』을 배웠다. 9세 때인 1876년 다시 청주 양곡리(양골, 지금의 미원면 용곡리) 외가 고장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외가 형 신철모와 함께 인근 유학자에게 한학을 공부하였다. 16세 때인 1883년에는 원주에 사는 원세화의 장녀와 혼인하였다.

18세인 1885년, 한학을 가르치던 스승 임약호(任弱鎬)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듬해 봄, 상주군 화서면에 머물고 있었던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최시형은 수도 정진하는 법을 일일이 설명하고, 동학의 부적인 영부(靈符)도 친히 써 주었다. 이후 밤낮으로 동학 경전을 연구하고 주문을 외우며 수도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잠시 누워 있는데 갑자기 집에서 불길이 솟았으며, 집안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천사(天師)에게 고하니 불이 저절로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동학에 입교하여 신비를 체험한 것이다.

1887년 20세 때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급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최시형의 명을 받들어 집에서 49일 기도를 하였고, 보은 장내리에 동학의 중앙본부로서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될 때 중정(中正)의 중책을 맡았다.

천도교 간부들(앞줄 왼쪽 세번째 권병덕) [판형4]

1893년 미원 용곡리 자택에 최시형이 머물며 복합 상소를 준비하여 일시적으로 동학 본부 역할을 하였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와 농민들의 거듭된 시정 요구가 묵살되고 오히려 탄압을 받자 이에 반발하여 전봉준 등이 이끄는 전라도 동학(남접)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동학(북접)은 때를 기다리라고 하며 봉기에 반대하여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라도 동학 교도들에 대한 관군의 탄압이 가해지자 최시형이 명을 내려 각지의 동학교도들이 남접을 돕기 위해 봉기하게 하였다. 이에 충경포(忠慶包) 차접주(次接主)로서 충경포와 문청포(文淸包) 교도 3만여 명을 인솔하여 김연국(金演局)·황하일(黃河一)과 함께 남접과 공동 전선을 펴기 위해 옥천군 청산에 집결하였다.

관군과 수차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피신하였다. 피신 중 영동과 논산에서 관군과 맞닥뜨려 체포될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1896년, 충주 외서촌으로 옮겨온 최시형을 만났다. 최시형은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세를 회복하도록 지시하였다.

1907년 손병희가 동학의 일파로서 친일화한 일진회 간부를 축출하자 이에 반발한 이용구 등이 동학에서 분리하여 시천교를 따로 창건하였다. 이때 천도교 보수파인 김연국이 시천교로 옮겨 교주에 추대되었다. 이때 시천교로 옮겨 시천교 육임 중 교수(敎授)에 올랐다. 시천교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며 천도교와 종통(宗統) 투쟁을 벌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에 반대하지 않았다. 시천교가 친일적이었고, 시천교의 주요 직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경교』 [판형1]

1911년 시천교의 임원을 새로 구성하면서 이용구계가 육임 자리를 차지하며 교권을 장악하면서 교화를 담당하는 관도사(觀道師)로 밀려났다. 이듬해에는 시천교가 교역자 양성을 위해 건립한 종학관(宗學館)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시천교월보』에 「시천역사」를 기고하고, 시천교 경전인 『시의경교(時儀經敎)』를 펴내는 등 교리를 정리하였다. 1912년 초 임원진을 새로 구성할 때 요직인 종무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송병준 일파가 교권을 장악하여 독단적으로 운영을 하자 1913년 초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해 3월 김연국계도 시천교 본부와 결별하고 시천교 총부를 설립하였다. 두 단체 모두 친일적 성향이 농후하였다. 김연국 계열로서 1915년 독자 노선을 걷고자 중앙시천교회본부를 개교하고 천종사장(天宗師長)이 되어 새로운 시천교 지파의 수장이 되었다. 이 또한 친일 성향의 종파였다. 그러나 1916년 참회식을 가진 후 천도교로 복귀하였다.

천도교로 복귀한 뒤 천도교 도사로서 손병희의 아낌을 받았다. 손병희의 승례(承禮, 일명 接待係)로 집사 일을 하며 최측근으로 있었다. 그러던 1919년 2월 20일경, 손병희는 시대의 흐름이 변하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있어도 일본의 이익이 되지 않으므로 한국은 독립하고, 그 후에 일본과 제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3·1운동 민족 대표로 참여하라고 권유하였다. 손병희의 권유를 받고 참여하였다.

2월 26일 김상규의 집에서 열린 천도교 측 대표자들 모임,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전체 민족대표의 최종 회합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반, 손병희와 함께 태화관으로 나갔다.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 중 원격지에 있어 늦거나 현지 독립운동 지도를 하는 4인을 제외하고 29인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다른 민족 대표들과 함께 일제에 연행되었다.

오랜 기간 재판을 거친 결과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1월 4일 출옥하던 날,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옥중에서 얻은 교훈은 동포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 중앙교회 심계원장(審計院長), 감사원장, 선도사(宜道師) 등을 지내며 천도교의 중심적 역할을 계속하였다.

천도교 지도자로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의 역사서를 남겼다. 특히, 『조선총사』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열사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여 독립운동을 부추겼다고 출판법의 안녕 금지 조항에 의해 삭제 처분을 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참고문헌|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5 : 朝鮮 1 三·一運動篇一, 東京 : みすず書房, 1966 ;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6 : 朝鮮 2 三·一運動篇二, 東京 : みすず書房, 1967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1 民族主義運動篇, 東京 : 原書房, 1967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1分冊 民族主義運動篇, 東京 : 原書房, 1967 ; 國會圖書館 編, 『韓國民族運動史料 三·一運動篇其一』,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집, 1972 ; 市川正明 編, 『三·一獨立運動史』 1~4, 高麗書林, 1989 ;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11~12집, 198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2~3권, 1971 ; 김정인, 「大韓帝國期·日帝强占期 侍天敎의 존재양태와 활동」, 『國史館論叢』 103집, 2003.
  • 권병덕
  • 최시형
  • 천도교 간부들(앞줄 왼쪽 세번째 권병덕)
  • 『시의경교』
  • 3·1운동 당시 권병덕이 살던 곳(서울 종로 북촌)
  • 공소공판 당시 권병덕 진술(『동아일보』 192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