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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동진 權東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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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동진
한자명 權東鎭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출신지 충북 괴산(槐山)
생몰년월일 1861. 12. 15 ~ 1947. 3. 9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천도교, 신간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0년 동학 입교,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1926년 6.10만세운동 후원, 1927년 신간회 부회장, 1929년 신간회 복대표대회 집행위원장
포상훈격(연도) 대통령장(1962)
천도교 간부(뒤쪽 좌측 권동진) [판형3]

1861년 12월 15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소수면(沼壽面) 아성리(阿城里) 안심마을에서 아버지 권재형(權在亨)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여섯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 도호(道號)는 실암(實菴) 등을 사용하였다.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괴산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집안은 증조부 권필(權弼)이 무과에 급제한 뒤 오위도총부 부총관,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면서 무인 가문을 형성하였다. 백부 권재유(權在裕)와 아버지 역시 무과에 급제해 백부는 절충장군, 아버지는 경상도 중군(中軍)을 지냈고, 셋째형 용진(溶鎭)과 다섯째 형진(瀅鎭)도 무과 급제를 통해 무관의 길을 걸었다.

1869년 서울 재동으로 이사하고, 21세 되던 1882년경 하도감(下都監)에서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사관학교 1기생 108명 가운데 10명이 졸업하였는데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조희문 등과 초관(哨官)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에 있다가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서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으며 개화 운동에 참가하였다.

1887년 웅천현감과 함안군수 등을 역임하다가 1888년 1년여 동안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3년 안무영 종군, 1894년 거문도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대원군의 지시로 동지들과 경복궁 점령에 가담하였다가 1895년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초기에 일본 도쿄의 근위사단에서 병학을 공부하는 한편,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습을 쌓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 사무를 익혔다.

1900년 오사카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손병희와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1년 초 동학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한 바 있던 손병희는 1902년 초 24명의 유학생을 이끌고 일본에 건너왔다. 이상헌(李祥憲)으로 이름을 바꾼 손병희는 정체를 숨기고 조희연·오세창·이진호·조희문·박영효 등과 교류하면서 동학의 재기를 꾀하던 중이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고 1906년 1월 5일 귀국하였다. 11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손병희 등과 함께 교우구락부를 세우고 천도교의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았다. 도집(都執), 도사(道師),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며 천도교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대한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1908.11.17) [판형2]

1907년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 만에 그만두고, 박문사라는 인쇄소 겸 출판사를 인수하여 보문관을 설립해 관장을 맡는 한편 대한협회 등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 시절 실업부장과 부회장 등을 맡으며 실업 진작을 통한 부국강병의 근대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무렵 대한협회 지도부는 권동진을 비롯하여 오세창·이병호·이종일·한기준·장기렴 등 주요 교직자들이 간부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을사늑약에 의한 일제의 통감 정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문명 부강을 이루면 국권 회복도 달성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당장 독립의 실현보다 문명 개화의 실현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실업을 잃어버린 나라를 되살리려면 무엇보다 산업 개발과 실업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대한협회를 통해 실업 발달을 이룩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등을 통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에서 국민 계몽과 식산흥업으로 민족 자강을 달성한다는 자체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명개화론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였으며, 대한협회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은 근대화를 추구하던 노선에서 독립운동의 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갈 것인지, 국내에 남아 천도교를 통해 대중과 함께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할 것인지 두 갈래의 길을 놓고 고민하다가, 일단 천도교 포교를 주어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국내에서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길을 택하였다. 당시 이동휘가 찾아와 함께 망명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기회를 보아 나중에 나갈 것’이라며 국내에 머물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평화회의에 제출한 14개조 가운데 민족자결 조항에 한국 문제가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12월 초 오세창·최린 등과 뜻을 모아 기독교 세력과의 연합, 국외 민족운동 세력과 연결하는 전 민족적 틀에서 만세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이때 오세창과 함께 천도교 교단의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대외 관계는 주로 최린이 맡아 추진하였다.

손병희·오세창과 함께 천도교의 대표로서 2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당시 천도교 기도회의 종료 보고와 국장을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임예환·나인협·홍기조·박준승·양한묵·권병덕·나용환·이종훈·홍병기 등에게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을 알리고, 민족 대표로서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 경찰에 잡혀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출옥하였다.

출옥할 무렵 세상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이 일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대체로 20~30대 젊은 지식층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60이 넘은 나이에 민족 독립을 위한 길에서 사회주의를 품에 아우르는 포용성을 내보였다. 1923년 잡지 『개벽』에 발표한 「인류주의는 나의 가장 찬송(贊誦)하는 이상(理想)이외다」라는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모든 주의 중에서 인류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피력하면서, ‘인류를 위한 진리, 복리에 기반하고, 천부의 평등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인류주의’라 정의하였다. 그리고 인류주의 가운데 무형의 진리가 종교 또는 도덕이고, 무형의 진리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와 도덕은 정치적 수단으로 타락한 일도 있지만, 사회주의는 금권 만능주의의 해독을 지닌 사회 조직의 결함을 개조할 수 있는 ‘선견(先見)’을 지닌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해독을 제거하고 인류의 꽃다운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이 곧 최고 이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류주의를 최상의 이상으로 추구하고, 사회주의를 인류주의의 실현 논리로 포용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인류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무형적인 종교보다도 실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기까지 하였다. 종교와 도덕적인 힘에 의한 사회 개조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실질적 사회 개조의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 사회주의를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오세창·권동진·이종린(왼쪽부터) [판형4]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구심점을 잃은 채 분열에 휩싸였다. 신·구파의 분화는 4세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승계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박인호의 승계를 인정치 않으려는 신파의 최린은 자치론으로 기울었고, 구파의 권동진·이종린 등은 자치론에 반대하면서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의 사회주의 인사들과 연대를 강구할 만큼 민족통일전선에도 강한 지향을 보였다.

천도교 지도 세력은 1925년에 들어서 다시금 분화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손병희 사후, 교주 박인호도 사퇴하면서 최린·정광조를 축으로 하는 세력과 권동진·이종린을 축으로 하는 세력 간에 균열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천도교 세력 내 신구파의 분화는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6·10만세운동 시위 군중 [판형2]

1926년 초 자치론이 다시 고개를 들자 구파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비타협적 세력을 망라한 민족적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의 강달영과 접촉하면서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한 협의를 거친 바도 있었다. 천도교 상무종법사 권동진은 구파의 정점에 서 있었고, 당주동 집은 이들의 중심 무대였다. 천도교와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는 6·10만세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더욱 밀착되었다.

6·10만세운동 당시 천도교 구파의 지도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박래원을 앞세워 6·10만세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천도교가 6·10만세운동에서 맡은 역할은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이 주된 것이었다. 박래원으로부터 6·10만세운동의 추진 계획을 보고받고,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처 자금을 모으기도 전에 만세 운동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비록 만세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지 못하였지만,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한 6·10만세운동은 민족 통일 전선 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해 민족운동이 전개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1운동이 종교 이념을 초월한 민족운동이었다면, 6·10만세운동은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국외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번져 나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6·10만세운동 직후 이종린·박래홍 등과 함께 신간회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신간회 본부 부회장을 맡았고, 1929년에는 복대표 대회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신간회에 대한 열정은 1929년 『동아일보』가 당시 유명인사를 상대로 ‘10만 원이 생기면 어떠한 일에 쓰겠는가’라는 설문 조사 때, 신간회 본부 회관을 건축하는 일과 신간회 사업 자금으로 쓸 것이라는 답변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간회 창립 당시 이상재와 함께 회장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회장 선거에 이어 부회장 선거에서까지 낙선하고 간신히 평간사로 선출되는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신간회 운동에 열중하였고, 일의 성패를 떠나 해야 할 일이라면 마땅히 행하는 소신을 보였다. 또한, 근면·성실·검약의 정신과 면모는 어떠한 고통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높은 지조를 지켜나간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간회 운동에 매진하였 것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현실에서 민족운동 세력이 결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 규명을 위해 광주에 사람을 파견하는 한편 민중 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대중에게 밝히고, 학생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의한 대회였다. 신간회의 원로 지도자로서 대회 당일인 12월 13일 연설을 담당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사전 탄압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일흔 노구에 또다시 영어의 신세를 지고 말았다. 1930년 쇠약해진 건강을 이유로 1월 초 출옥한 뒤에도 신간회 운동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일선에서 활약하였으나, 1931년 5월 신간회가 끝내 해산하면서 민족통일 전선 운동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이 무렵 신파가 자치론을 다시 들고나오자, 천도교청년동맹을 통해 자치운동을 규탄하였다. 결국 천도교계는 1932년 4월 박인호의 교조 인정 문제로 신·구파로 다시 분열될 때 구파의 대령(大領)을 맡아 구파를 이끌어 나갔다.

신간회 해체 이후 70이 넘은 고령으로 민족운동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1930년대 만주 침공 이후 거세지는 일제의 탄압과 회유의 공세에도 흔들림 없이 민족적 지조를 지켰다. 상당수의 운동가와 지식인이 변절하였을 때도 지조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비록 몸은 늙었지만 청절한 지사의 처신 그 자체였다. 실행과 실천, 실질을 숭상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명리를 쫓는 명망가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지도자였다.

1946년 중앙청에서 연설하는 권동진 [판형2]

1945년 광복 당시 85세를 넘어선 나이에도 독립국가 건설의 일념으로 건국 운동에 매진하였다.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 건설에 힘을 기울이는가 하면,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아 나갔다.

또한, 정치권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 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분열 상태를 보이자, 신한민족당을 결성하며 ‘자율적 통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 민족의 총의와 총력을 집중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건국 운동은 독립운동을 계승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려는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독립 달성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가 광복 후 정국의 혼란이 가중되던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니, 장례는 천도교당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참고문헌|

권동진, 「實業精神의 如何」, 『대한협회회보』 제5호, 1908.8 ; 권동진, 「商務의 槪念」, 『대한협회회보』 제10호, 1909 ; 권동진, 「人類主義는 나의 가장 贊誦하는 理想이외다」, 『개벽』 제33호, 1923 ; 권동진, 「韓末人物의 回想, 생각나는대로 녯사람들을」,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 ; 「한말 정객의 회고담, 천도교 중진 권동진씨(1~6)」, 『동아일보』 1930.1.25~2.1 ; 「韓末人物의 回想, 생각나는대로 녯사람들을」,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 ; 이종린, 「一點無私心의 權東鎭, 朝鮮 民衆의 指導者 總觀」,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 ; 「著名人物 一代記」, 『삼천리』 제9권 제1호, 1937 ; 김정인, 「1910~25년간 天道敎 勢力의 동향과 民族運動」, 『한국사론』 32, 1994 ; 장석흥, 「천도교 구파의 6.10만세운동」, 『북악사론』 4, 북악사학회, 1997 ; 최기영,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 일조각, 2003 ; 장석흥, 「권동진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학논총』 30,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08.
  • 청년 시절의 권동진과 오세창
  • 권동진 생가(충북 괴산)
  • 대한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1908.11.17)
  • 독립선언서(보성사판)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0.10.30)
  • 오세창·권동진·이종린(왼쪽부터)
  • 6·10만세운동 시위 군중
  • 1946년 중앙청에서 연설하는 권동진
  • 권동진
  • 천도교 간부(뒤쪽 좌측 권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