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약연 金躍淵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약연
한자명 金躍淵
본 관 전주(全州)
이 명 자 : 용구(龍九), 호 : 규암(圭巖)
출신지 함경북도 회령(會寧)
생몰년월일 1869. 9. 12 ~ 1942. 10. 29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간민회, 간민교육회, 대한독립기성회, 간도대한국민회, 명동학교, 명동교회
관련 사건 용정 3.13의거
주요 활동 명동학교 교장,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회장으로 한인자치운동과 반일운동 전개, 대한독립선언서와 3.13독립포고문 발표에 참여, 대한독립기성회 의사부원, 명동교회 목사, 은진중학교와 명성여학교 이사장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77)

1869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부친 김석조(金) 錫祚와 모친 강씨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68년 10월 24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용구(龍九)이고 호는 규암(圭巖)이다. 1875년 7세부터 10여 년간 종성 출신의 유학자 남종구·오삼열·주봉의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맹자(孟子)』를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여서 ‘맹판(孟板)’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연(安淵)과의 슬하에 정근·정훈·정필·신복 등 3남 1녀를 두었다.

김약연 묘(중국 룽징) [판형2]

1899년 2월 18일 함북 종성에서 김약연의 전주 김씨 가문 31명, 문병규의 남평 문씨 가문 40명, 김약연의 스승 남종구(南宗九)의 가문 7명, 회령 출신 김하규(金河奎)의 김해 김씨 가문 63명 등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불구라재로 집단 이주하였다. 사전에 중국 국적으로 입적한 이들을 앞세워 불구라재의 청국인 토호 동한(董閑) 3형제 소유의 땅과 임야를 사들였다. 1900년에는 파평 윤씨 윤하현(尹夏鉉, 윤동주의 조부) 가문의 18명이 개산툰 자동(紫洞)으로부터 불구라재로 이주 합류하였다. 이들 네 가문은 장재·용암·대룡·영암 등 4개 촌을 개척하고 ‘명동촌’(明東村)이라 이름했다. 1901년 4월 명동촌의 한인들은 후세 교육을 위해 5만 평의 토지를 매입해 이를 기반으로 ‘규암재(圭巖齋)’라는 서당을 세웠고, 대룡동에는 김하규가 ‘소암재’를, 중영촌에는 남도천이 ‘오룡재’를 세웠다.

1907년 김영학·강백규·구춘선·유찬희·마진 등과 간도교민회를 조직하여 한인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교육계몽,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는 한편,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소유권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등 한인의 권익 옹호에 주력하면서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06년 12월 설립자 교장 이상설(李相卨)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사실이 알려지며 서전서숙(瑞甸書塾)은 폐쇄되었고, 일부 교원과 학생들은 명동촌으로 옮겨왔다. 이에 서전서숙을 계승할 신교육 기관으로 불구라재의 여러 서숙을 통합해 1908년 4월 27일 장재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장에 취임하였다. ‘명동’은 ‘동국(한국)을 밝힐 인재를 기른다’는 뜻으로, 직접 지었다.

1908년 신민회 회원으로 북간도교육단을 이끌고 룽징촌(龍井村)으로 이주해 온 정재면(鄭載冕)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다. 김약연은 정재면을 명동서숙 교사로 초빙하였고, 정재면은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예배를 보게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 명동촌은 신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교육을 하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1909년 4월에는 명동학교(명동야소교학교)로 개칭하였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3월 중학부를 증설하고 황의돈(黃義敦)·장지영(張志暎)·박태환(朴兌煥)·김철(金喆) 등을 초빙해 민족교육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1911년 함북 성진의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이 파견한 북간도 선교단 일원으로 명동촌을 방문한 이동휘가 ‘여성이 깨어야 나라가 독립한다’라며 여성교육을 권유해, 그해 3월 명동여학교가 병설되었다. 북간도는 물론 국내 및 만주 각처와 노령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통해 북간도 최고의 민족학교로 성장했으며, 명동 지역은 재만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당시 작문 시간에 ‘애국’, ‘독립’이란 낱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1909년 9월 청·일 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간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10년 3월 간민교육회가 설립되었고, 이때 간사로 임명되어 민족의식 고취와 경제력 향상 및 항일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연성자치제(聯省自治制)’와 민주공화제 실시라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자 간도 지역의 한인들도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교육회는 1913년 4월 간민회(墾民會)로 개편하고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주 한인의 자치기관을 자임하였다.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옌지(延吉)·허룽(和龍)·왕칭현(汪淸縣) 등지에 분회를 설치해 호구를 조사하고 인두세를 징수하고 교육계몽사업을 전개하는 등 북간도 한인 사회의 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중국 관청 또한 일체의 한인 관련 업무를 간민회를 통해 집행하였다.

그러던 중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를 위해 1914년 3월 지방연성자치기관 철폐 명령이 하달되면서 간민회 총회도 해체되었다.

명동학교 고등과 제5회 졸업사진 [판형2]

이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북간도 지역에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과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졌다. 이듬해 2월 8일 재일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한 소식도 북간도 지역 한인들을 고무시켰다. 이어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과 함께 연서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만주를 비롯해 국내와 러시아, 미주 등지로 전파되었다.

같은 해 2월 정재면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열리는 한족대표자회의에 참석할 북간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초까지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회의의 결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성립시켰고, 본 회의에서 “온갖 협박과 공갈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한국인은 일본에 합방을 원한다는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제공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라고 폭로하고 대비책 강구를 촉구하였다. 한편 러시아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명의로 발표된 대한국민의회 선언서를 기초에 참여했으며 파리강화회의 북간도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옌지현(延吉縣) 룽징 북쪽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고,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배포된 3·13 독립포고문에는 간도거류 한국 민족 대표 17인이 연서했는데,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렸다.

이후 북간도에서는 통일적인 독립운동 단체 결성을 위한 조선독립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의사부원(議事部員)에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회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또 같은 해 2월 말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성립하자, 5월부터 대한국민의회 간도지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수령(首領)’으로 지목되었고, 중국 옌지현장에 의해서 1920년 옌지감옥에 투옥되었다. 1922년 출옥하여 1923년 봄 명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3년 2월 26·27일 양일간 룽징에서 열린 30만 간도 한인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을 주장하는 전간도주민대회에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이후 간도의 자치권 획득을 위해 중국 당국과 교섭하며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면모를 지켜본 중국인들과 중국 지방행정 당국자들은 간도의 ‘한국대통령(韓國大統領)’으로 부르기도 했다.

1924년 흉년에 재정난이 겹쳐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면서 명동촌을 떠나 룽징으로 이주했고, 명동학교는 소학교만 남기고 중학교는 폐쇄됨에 따라 일부 중학생들을 은진중학교로 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공산주의운동의 영향으로 반종교 투쟁이 번지자 명동학교 운영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명동소학교는 명맥을 이어갔다.

1928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년간의 연구과정을 이수하고 1929년 2월에 졸업하는 특전을 받았다. 졸업 후 캐나다 장로회의 동만노회(간도노회)에서 목사로 일했고, 이듬해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37년까지 명동교회에서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을 전파하였다. 말년에는 캐나다 선교회가 운영한 룽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기독교 전교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1942년 10월 29일 룽징촌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여, 명동촌의 장재촌 산기슭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참고문헌|

『신한민보』 1913.8.22, 1914.2.26 ; 『독립신문』 1920.1.1 ; 이지택,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북간도」(1)~(35), 『중앙일보』 1972.10.12~11.21 ; 홍상표, 『간도독립운동소사』, 평택 한광중학교, 1966 ; 政協吉林省延邊朝鮮族自治州委員會 文史資料硏究委員會 編, 『延邊文史資料』 1~6, 1984~1988 ; 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2,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 韓後光 主編, 『中國朝鮮族人物傳』, 延吉 : 延邊人民出版社, 1990 ; 서굉일·김재홍, 『규암 김약연 선생』, 고려글방, 1997 ; 박주신, 『간도한인의 민족교육운동사』, 아세아문화사, 2000 ; 문재린·김신묵 지음, 문영금·문영미 엮음, 『기린갑이와 고만네의 꿈』, 삼인, 2006 ; 서대숙,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 文在麟, 「명동은 간도의 오룡촌」, 『두만강』, 심양 : 요녕민족출판사, 1995 ; 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교회 형성에 관한 연구」, 『국사관논총』 84, 1999 ; 이명화, 「북간도 명동학교의 민족주의교육과 항일운동」, 『白山學報』 79, 2007 ; 박걸순, 「간민회 선행조직의 추이와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5, 2009 ; 박걸순, 「북간도 간민회의 해산과 추이」, 『중앙사론』 30,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9 ; 이명화, 「북간도 한인사회의 기독교수용과 명동교회」, 『간도와 한인종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 김약연(프로필 사진)
  • 명동학교 고등과 제5회 졸업사진
  • 김약연 기념비(중국 룽징)[출판x, 웹사전 게시용]
  • 김약연 묘(중국 룽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