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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나중소 羅仲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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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나중소
한자명 羅仲昭
본 관  
이 명 자 : 영훈(泳薰), 호 : 포석(抛石)
출신지 경기도 고양(高陽)
생몰년월일 1867. 4. 13 ~ 1928. 8. 18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청산리대첩
주요 활동 북로군정서 설립, 청산리대첩, 돈화현(敦化縣) 독립군기지 개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866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훈(泳薰)이고, 호는 포석(抛石)이다. 188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무관으로 근무하던 중 대한제국이 신식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1898년 7월 1일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자 이 학교에 입학해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무관학교에서의 성적이 우수해 국비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해서는 대한제국의 무관으로 재임용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북간도로 건너온 백포(白圃) 서일(徐一)은 왕칭현(汪淸縣)을 근거지로 망명 의병세력을 규합해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이 보이자 이 단체는 국내에서 넘어온 대종교도와 공교회원(孔敎會員)들을 더 끌어 들이고 정의단(正義團)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919년 8월에는 왕청현 춘명향(春明鄕)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영을 설치한 뒤, 군정회(軍政會)고 바꾸고 북간도 여러 지역에 5개 분단(分團)과 70여개 지단(支團)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기와 독립군을 갖춘 독립군단(獨立軍團)이 되었다. 이때 중광단에 이어 군정회가 되기까지 어느 과정에서 참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1910년대 중후반부터 이 단체 지휘부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단체는 1919년 12월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그 소속 군단임을 자부하고 명칭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였다. 서일이 북로군정서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총재가 되었고, 사령관은 김좌진(金佐鎭)이었으며, 참모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아울러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쌓은 군사 지식을 후배 독립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사관연성소의 교수부장을 담당하였다.

 

북로군정서는 명칭을 바꾼 초기인 1920년 2월에 독립군 간부 양성기관인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였다. 교장은 김좌진이었고,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러시아사관학교, 운남성육군강무학교(雲南省陸軍講武學校),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등을 졸업한 이장녕(李章寧)·강필립·이범석(李範奭)·오상세(吳祥世) 등이었다. 이같이 뛰어난 교관들이 포진한 사관연성소에서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모집된 약 400명의 독립군 간부 후보들에게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축성교범(築城敎範) 등의 교재로 학과 교육을 받고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사용법 등을 가르쳤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1919년 만세운동 후 북간도지역에 설립된 여러 독립군단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1920년 4, 5월경 이들 군단들은 협의회(協議會)를 구성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 회합에 김좌진과 함께 북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였다. 참가한 군단은 북로군정서를 비롯해 신민단(新民團)·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광복단(光復團)·의군단(義軍團)·국민회 등 6개였다. 회합에 참여한 독립군단 대표들이 합의한 사항은, 임의로 모연대 또는 단원 모집원을 파견하지 말 것, 이미 타 독립군단에 적을 가진 독립군을 빼가지 말 것, 각 군단이 이미 조직해 둔 지방기관은 서로 인정하고 지켜줄 것, 통신사항 또는 긴급히 경계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신속하게 전달해주고 힘을 합해 지원해 줄 것 등이었다. 이를 위해 협의회를 구성해 『협의회 기관보(機關報)』를 발행하고, 매월 1일과 15일 정기적으로 만나 상호 원활한 조국 광복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소통하자고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협의회가 조직되기 하루 전인 5월 2일 북간도지역의 또 다른 독립군단인 임창세(林昌世)가 이끄는 야단(野團)이 북로군정서로 통합되었다.

 

1920년 9월 9일 중도의 탈락자들을 제외한 298명의 사관연성소 제1기생이 졸업식을 가졌다. 졸업생들로 본대와는 별도의 교성대(敎成隊)가 조직되었는데, 교성대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끝나고 채 한 달이 안 된 10월 2일 일제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 독립군기지를 향해 침입시켰다. 일본군들의 침략 이유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서북간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이 압록·두만강을 넘어 일제의 군사기지를 비롯한 침략기관을 공격하고, 그들의 수뇌들을 척결하는 군사작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한국 내에 주둔하는 일제의 ‘조선군(朝鮮軍)’, ‘관동군(關東軍)’, ‘시베리아파견대’, ‘북만주파견대’ 등의 일본군들이 서북간도를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 공격해 들어 왔다.

 

일제의 이러한 공격에 독립군들은 일시적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였다가 일본군들이 물러간 뒤 돌아오는 계획을 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청산리전투였다.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등이 먼저 이동하였고,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의 졸업식과 잔무처리 때문이 조금 늦게 출발하였다. 그밖에 광복단·신민단·의민단(義民團) 등과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도 움직였다. 이들 독립군단들의 독립군들은 1920년 10월 20일경 이동 중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의 청산리에 모이게 되었다. 추격 과정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들은 10월 21일부터 독립군들을 향해 총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들의 공격에 독립군들도 연합부대를 결성해 대응하면서 10여 일간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북로군정서 교성대를 지휘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섰다. 백운평(白雲坪)·완루구(完樓溝)·천수평(泉水坪)·어랑촌(漁郞村)·천보산(天寶山)·쉬구·고동하(古洞河) 전투 등이 청산리전투에서 이루어 진 주요 전투들이다. 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은 독립군들은 일본군 천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전투가 끝난 후 독립군들은 안투현(安圖縣)·옌지현(延吉縣) 등을 거쳐 북만주의 밀산(密山)까지 이동하였다. 부하 2명과 평민 복장을 입고 변장해 밀산으로 향한 길을 잡았다. 나머지 교성대원들도 삼삼오오 나뉘어져 목적지인 밀산에 모였다. 일시에 모인 독립군의 총 병력이 약 3천 5백명에 달하였다. 이들 병력으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라는 대규모 군단을 조직하였다. 서일을 군단을 지휘할 총재에 선임하고 소련의 이만으로 병력을 이동하였다.

 

1921년 초 지원을 기대하며 이만까지 왔으나 소련측은 독립군들이 무장을 해제한 후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해 자신들의 군(軍)에 편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는 이를 수용한 측도 있었으나 북로군정서와 일부는 이를 거부하고 같은 해 3월 하순 따로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21년 4월 12일에는 이동 중 흩어졌다 다시 모인 36개의 독립군단 및 독립운동 단체의 소속원들을 집합시켜 ‘독립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먼저 그 장소에 모인 36개 독립운동단체 소속원들 모두를 가입시켜, 대한총군부를 없애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간부진에는 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 고문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 최진동(崔振東), 사령관 겸 참모부장 김좌진이었고, 이장녕(李章寧)과 함께 참모장에 선임되었다.

 

대한독립단이 성립되고 곧 총재 서일의 명을 받고 현천묵(玄天默)과 만주로 파견되었다. 현천묵은 북간도, 자신은 서간도를 맡아 이 지역 독립군단의 통합을 주선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지역과 상황을 조사할 것과 중국측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섭외, 그리고 한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것 등 이었다. 명에 따라 서간도로 통하는 관문인 둔화현(敦化縣) 사하연(沙河沿)으로 갔다. 이들이 출발하고 곧 대한독립단 본단도 5월 중순까지 북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왔다.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1년 9월, 사령관 김좌진이 서신을 보냈다. 곧 있을 태평양회의에 임시정부는 외교적으로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니, 우리는 무장활동으로 일제에게 피해를 입혀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안도현에 주둔하고 있는 북로군정서 2중대를 국내로 진입시켜 삼수군(三水郡)에 파견 되어있는 제3중대장 이영식(李永植)과 힘을 합해 활동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파견될 때는 청산리전투 후 북만주로 이동할 시 둔화현에 숨겨 둔 무기도 함께 보내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 서신은 일제가 가로채 보고한 내용이기에 김좌진의 주문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921년 중하순 국내에 파견된 이영식부대가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를 무대로 활발한 무장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단지 이영식부대의 소속이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으로 일제측은 보고했는데 이 군단도 대한독립단으로 통합된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어 청산리전투 후 급변하는 독립군단의 명칭에 혼선이 있었을 수도 있다.

 

돈화현에 근거지를 구축한 뒤, 바로 접해있는 지역인 안도현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하고 소장에 선임되었다. 간도참변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당한 간도의 한인 청년들이었으므로 독립군양성소의 교육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1921년 10월 3일에는 밀산으로 가 김좌진과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졸업생들을 소집해 대규모 국내진입전을 펼칠 작전계획을 짜기도 하였다. 청산리전투의 경험을 가진 사관연성소의 졸업생들이었으므로 지금 양성하고 있는 생도들과 함께 국내로 진입시킨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양성소가 있는 안도현으로 모이라는 소집령을 내고, 모연대를 옌지(延吉)·허룽(和龍)·왕칭(汪淸) 등 북간도 전역에 파견해 군량미를 준비시켰다.

 

1922년 초에는 원 북로군정서 모연대장이었던 이홍래(李鴻來)와 힘을 합해 근거지를 구축한 둔화현 사하연에 있는 중국인 왕덕산(王德山) 소유의 광활한 평야와 황무지를 구입하였다. 이 토지 구입계획은 둔화현에 도착하자마자 세운 것으로,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 서북간도를 침략한 일본군을 맞아 독립군들은 청산리전투라는 대승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독립군들이 북만주로 이동하고 난 뒤 일본군들은 이주 한인사회에 보복적 만행을 자행해 3천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피살되고 수많은 가옥과 민족학교·교회 등이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대다수의 한인들이 생계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 토지는 이같은 한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이 토지에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한인 약 4백 명을 수용해 농사를 짓는다는 계획을 짰다. 매입금 4분의 1은 그와 김좌진 등 독립군 지휘부가 마련했고, 나머지는 임시정부 군무총장인 노백린(盧伯麟)에게 연락해 임시정부 공채를 교부받아 이를 만주와 국내의 유지들에게 매매해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노백린은 대한제국군 정위(正尉)로 근무할 때 참령(參領)이었으므로 국권을 빼앗기기 전에는 군대의 상관이었다.

 

1921년 말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가 도착하자 1월 초순 명령을 내려 정신(鄭信)을 대장으로 한 모연대 15명, 정사흥(鄭士興)을 대장으로 한 모연대 15명을 간도지방을 향해 출발시켰다. 또 군정서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제자 정규환(鄭奎煥)이 12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함경도 지방으로 출발하였다. 둔화현을 근거지 해 이주 한인의 자립을 위한 이러한 사업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 이 사업은 다른 민족운동자들도 참여해 둔화현 이북의 액목현(額穆縣)·닝안현까지 확대되어 이들 지역에 많은 한인들이 이주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둔화현에 근거지를 옮긴 뒤 노력한 광복을 위한 사업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한 활동이었다. 1923년 8월 15일 서간도 화뎬현(樺甸縣)에서 남북만주의 독립군단을 통일시키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58명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였다. 이 회의에 둔화현 대표로 참석하였다. 회의 주제는 이주 한인의 교육과 경제에 대한 문제, 민족과 노동문제, 각지 청년단 발전책, 군사외교 문제, 신독립당(新獨立黨) 조직, 남북만주 각 단체 및 군사기관 통일 등이었다. 이 중 대표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주제는 마지막의 각 단체와 군사기관 통일에 관한 것이었다. 협의 끝에 대표들은 먼저 ‘만몽신당(滿蒙新黨)’이란 단체를 조직해 이를 통해 상호연락하며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데 합의하였다. 당의 위치는 내몽고에 두며, 그 곳에 대규모 토지를 구입해 군사령부와 사관학교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루어가기로 계획하였다. 이 당의 간부진은 총리 이범윤(李範允), 부총리 김성극(金星極), 서무부장 김동삼(金東三), 군사부장 이장녕(李章寧) 등이었고, 지청천(池靑天)·안무(安武) 등과 함께 군사부 부원에 선임되었다. 이 회의는 그 해 11월 3일에야 종료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 대표 58명이 모여 70일간 논의 한 이 화덴현회의의 합의 사항은 실천 단계까지 가지 못하였다. 각 단체 간의 이해관계가 틀린데다가 대토지 구입은 열악한 환경에서 조국 광복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1924년 3월 하순에는 양기탁(梁起鐸)·신숙(申肅)·윤해(尹海) 등이 주도하여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를 추진하는 인사들은 약 4개월간 각 단체 대표들에게 연락을 보내고 협조를 구해 그해 7월 10일 지린(吉林)에서 발기회를 열었다. 그리고 10월 18일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화뎬현회의와 마찬가지로 만주에 근거지를 가진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자는 이 회의에 성의준(成義俊)·김희락(金熙樂)과 함께 동로군정서(東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였다. 10여개 단체 대표들이 모인 전만통일회의는 이후 논의를 발전시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고본계(固本稧) 등 8개 단체가 통합에 합의해 그 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북로군정서나 동로군정서는 이들 단체들과 합의를 이루지 못해 중도에서 이탈하였다.

 

남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이 정의부로 통합을 이루자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도 통합을 위해 움직였다. 김좌진·남성극(南星極)·최호(崔灝)·현천묵·조성환(曺成煥)등은 1925년 1월 북만주에 근거지를 가진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중동선교육회(中東線敎育會)와 16개 지역 대표들에게 연락해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과 합의를 이루어 1925년 3월 10일 정의부와 마찬가지의 독립군정부(獨立軍政府)인 신민부(新民府)를 성립시켰다.

 

신민부 성립 초기 참모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金赫), 민사부위원장은 최호, 외교부위원장은 조성환이었고, 군사부위원장 겸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그 외 법무부·경리부·교육부·선전부·연락부·실업부 등의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인 심판원이 있었고, 보안사령부·별동대와 5개 대대의 군사기관이 편성되었다. 동빈현(東賓縣)에 본부를 두고 닝안·무단장(牧丹江)·목릉·둥닝현(東寧縣) 등을 중심으로 소만 국경지역까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지역 내에 사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안정을 위한 실업 장려, 2세들을 위한 민족교육 등 민정활동과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무장 활동을 펼쳤다.

 

신민부 본부는 동빈현에 두었지만 닝안현에 지부를 만들었고, 모아산(帽兒山)·일면파(一面坡)·오길밀하(烏吉密河)·해림(海林)·무단장(牧丹江)·목릉·소수분(小綏芬)·둥닝현 등에 통신기관을 설치해 관할지역을 관리하고, 무장활동을 위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소련에서 돌아 온 후, 약 4년간 모든 노력을 기울여 개척한 둔화현의 근거지에는 판사부(辦事部)를 설치하였다. 판사부는 동만주지역을 이끌어 갈 신민부의 지방기관이었다. 둔화현 이도양자(二道梁子)에는 판사부 본부가 설치되었고, 둔화현 전지역을 10개 구(區)로 나누어 각 구마다 구판사처를 만들었다. 판사부 본부의 간부인 이승림(李承林)이 외교위원이 되어 이주 한인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중국측과 교섭하였다. 그리고 각 구의 책임자들은 그 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군요원을 모집하기도 하고, 의무금을 거두어 신민부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둔화현에 이 같이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구축하여 활동하다 1928년 8월 1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나중소 활동 기사(『시대일보』 1924. 4. 15) [판형1]

 

신민부 검사원에 임명된 나중소(『독립신문』 1925. 5. 5) [판형1]

 

 

⋮채영국⋮

|참고문헌|

「高警第16314號 國民會ト他ノ團體トノ確執ニ關スル件」, 1920. 6. 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不逞鮮人根據地竝ニ各團組織ニ關スル件」, 1920. 8. 1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露領イマンニ於ケル獨立軍大會ニ關スル件」, 1921. 5. 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高警第16827號 間島地方ノ不逞狀況ト大韓獨立團員ノ派遣」, 1921. 5. 2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2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第413號 金佐鎭ノ所在地ニ關スル件」, 1921. 10. 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第58號 軍政署李鴻來一派ノ農事經營ニ關スル件」, 1922. 2.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第104號 不逞團ノ聯合會議開催ト水田事業ニ關スル件」, 1923. 4.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第572號 敦化縣地方在住朝鮮人ニ關スル件」, 1926. 6. 8,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公第185號 樺甸縣ニ於ケル南北滿洲不逞鮮人團統一大會經過報告ノ件」, 1923·12.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公第242號 不逞鮮人等ノ全滿統一大會ニ關スル件」, 1924. 11. 2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동아일보』, 1928. 10. 11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3, 東京: 原書房, 1967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 1973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 윤병석, 『독립군사』, 지식산업사, 1990 ; 채영국,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나중소 활동 기사(1924.4.15)
  • 나중소 활동 기사(『시대일보』 1924. 4. 15)
  • 신민부 검사원에 임명된 나중소(『독립신문』 1925. 5. 5)
  • 신민부 검사원에 임명된 나중소(『독립신문』 192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