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강 金海岡 |
한글명 | 김해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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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金海岡 |
본 관 | |
이 명 | |
출신지 | 평안북도 강계(江界) |
생몰년월일 | 1893. 9. 9 ~ 1959. 9. 5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관련 단체 | 대한통의부, 신민부 |
관련 사건 | 강계군 만세운동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강계 사립영실중학교 교사로 강계군의 3ㆍ1독립운동 주도, 신민부 민사부위원ㆍ교육부위원ㆍ군사부위원 역임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1990) |
1893년 9월 9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어청면(漁雷面) 풍청리(豊淸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남신면(南新面) 가신동(加山洞)이다. 본명은 김상진(金尙振)이며, 유금강(劉金剛)과 김해강(金海岡·金海剛·金海崗)이라는 한자를 달리한 이명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강계 사립영실중학교(私立英實中學校) 교사로 근무할 때 강계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영실중학교는 1907년에 미국 북장로교의 후원으로 설립 운영되었으며, 이 학교 교사들은 3·1운동 당시 명신학교(明信學校)의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에 쓸 태극기 2천장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풀려난 뒤 만주로 망명하여 1924년 7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통의부(統義府)계열의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북만주 민적조사위원(北滿洲民籍調査委員)에 임명되었다.
1926년 9월 김좌진(金佐鎭)의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여 민사부 위원을 비롯하여 교육부 위원과 군사부 위원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1937년 10월 3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38년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후 행적은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