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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장식 金章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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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장식
한자명 金章植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자 : 문백(文伯), 이명 : 김매정(金梅亭)·김을석(金乙錫)·김낙파(金洛坡)·김훈식(金勳植)·김근식(金根植)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98. 1. 4 ~ 1949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구국단, 통의부, 정의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0년 11월 구국단에 가입해 군자금 모집,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와 정의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5)

1898년 1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에서 아버지 김조락(金潮落)과 어머니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문백(文伯)이다. 이명은 김매정(金梅亭)·김을석(金乙錫)·김낙파(金洛坡)·김훈식(金勳植)·김근식(金根植)을 썼다. 서간도(西間島)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의 6촌 동생이다. 족보상으로는 6촌 관계이지만, 김동삼의 부친 김계락(金繼洛)은 김조락의 친형이었으나 큰형 댁으로 양자를 가 사촌이 되었다. 따라서 그 밑의 자식들인 두 사람도 같은 할아버지 밑의 사촌관계였다. 경술국치 후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조국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동삼·김동만(金東滿) 형제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어려서부터 애국충절의 가풍 속에서 성장하였다.

 

1920년 11월 정인호(鄭寅琥)가 주도하여 조직한 구국단(救國團)의 단원이 되었다. 경술국치 이전 군수(郡守)로 재직하던 정인호는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이 보이자 중국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고 있던 정인호는 그 해 3월 하순 동지인 장두철(張斗徹)을 그곳으로 보냈다. 장두철은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방침과 형편을 여러 명의 특파원을 보내 정인호에게 전하였다. 그런가 하면 중국인 장홍해(張鴻海)를 통해 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전달한 사항은 임시정부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필요한 독립자금을 모아서 보내라는 것과 국내의 유력자에게 연락을 취해 임시의정원 의원을 선정해 보내달라는 것 등이었다.

 

장두철의 연락을 받은 정인호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자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구국단을 결성해 단장이 되었다. 이때 경북 봉화군(奉化郡)의 강일(姜鎰)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책임자로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국단은 군자금 납입 명령서를 제작해 전국의 부호들에게 보내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모집해 중국인 장홍해를 통해 상하이로 보냈다. 하지만 이 같은 활동은 이듬해 3월 일제의 감시망에 포착돼 단장을 포함한 단원 19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동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신속히 국내를 떠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시기 서간도는 망명 민족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독립운동기지가 구축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여러 개의 독립군단이 성립되어 있었다. 도착한 류허현(柳河縣)·퉁화현(通化縣) 지역은 국내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들이 계획적으로 개척한 기지였다. 게다가 개척에 참여한 많은 인원이 고향인 안동과 예천(醴泉)·영양군(英陽郡) 출신의 인사들이었다. 따라서 서간도 독립운동계에 자연스럽게 가담할 수 있었다.

 

김동삼이 참모부장으로 있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대원이 되었다. 임시정부 직속인 서로군정서는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와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을 이끈 항일 무장 독립군단(獨立軍團)이었다. 그러나 대원이 되었을 당시 서로군정서뿐 아니라 서간도지역에 근거지를 가진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은 활발한 무장활동을 벌이기 어려운 시기였다. 독립군들의 국내진입작전에 큰 피해를 입은 일제가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서북간도 지역에 침입시켜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는 만행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들의 침략을 피해 독립군들은 산간 오지로 피신했고, 독립군 병영과 이주 한인사회는 초토화되었다. 이 경신참변 때 김동삼의 동생으로 리우허현에서 민족학교인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장으로 활동하던 김동만도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이 같이 수난을 당한 독립군들은 1921년 중반 일본군이 철수하자, 한인 사회를 재건하고 항일 무장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2년 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 등이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여기에 서로군정서도 일부가 참여하였다. 통군부 지도층은 그 해 여름까지 통합 운동을 계속 추진해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 지역의 17개 단체를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이주 한인의 자치와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 독립전쟁 수행을 함께 실행한 이 통합 독립운동 단체는 김동삼이 총장이 되어 이끌게 되었다.

 

이 같은 과정을 겪어 탄생한 통의부의 대원이 되었다. 실지로는 사촌형이면서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위인 김동삼이 단체의 총책임자가 되었기에 그를 보필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독립군 유격대, 또는 파견대에 가담해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1924년 10월 26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1924년 10월 김동삼의 명령을 받고 동지와 함께 경기도 지역 독립군 요원 모집을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은 기사로 판단된다. 이후 재판 또는 투옥에 대한 후속 보도가 없다. 또 이때는 통의부가 두 번의 내분을 겪고, 두 세력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통합운동을 추진하던 분주한 시기라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는 구성원 모두 오직 조국 광복만을 목표로 하고, 개인의 이념과 노선은 무시한다는 약속을 하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왕정복고를 이념으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 인사들이 1923년 초 공화주의 계열에 불만을 품고 조직에서 빠져 나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만들었다. 이어 1924년 중반에는 자치 활동보다는 항일 무장활동에 치중하기를 주장하는 통의부 의용군 내 지휘관들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상의한 후,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설립해 분리해 나가고 말았다. 의군부 때와는 달리 참의부로는 상당한 통의부 의용군 세력이 빠져나갔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통의부 지도층은 얼마간 사태를 수습한 후 또 다시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했다. 이 통합운동에는 통의부 성립 시 참여하지 않았던 서로군정서 잔류세력과 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 등 7개 단체가 동의해,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 포함 총 8개 단체가 통합해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정의부에서도 중앙조직의 외무위원장, 학무위원장 등 중요 직책을 맡은 김동삼을 보필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정의부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신민부(新民府)·참의부 등과 3부의 시대를 열며 만주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1927년 초, 재만(在滿) 독립운동계에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운동이 일어났다. 재만 독립운동계가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하나의 독립운동체로 뭉쳐 조국 광복을 위해 매진하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도 만주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만드는 데 실패하고, 북만주를 관할하는 혁신의회(革新議會)와 남만주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부(國民府)가 성립되며 크게 두 갈래로 갈리고 말았다. 대부분의 정의부 인사들이 국민부를 선택했으나, 김동삼은 혁신의회에 가담해 의장을 맡고, 그 이면 기관인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김동삼과 함께 북만주로 옮겨 아청현(阿城縣)에 거주하는 이주 한인들로 향방농무계(香坊農務稧)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한인들과 함께 자치활동에 노력하고 있을 시기, 1931년 10월 하얼빈(哈爾濱)에 있는 동지의 집에 투숙하고 있던 김동삼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듬해 4월 농무계 회원들과 새로운 토지를 물색하기 위해 아청현 제3구에 있는 태평교(太平橋) 부근을 답사하던 중 중국 비적의 공격을 받고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한동안 치료를 위해 지인이 많은 남만주로 가 치료를 받았다. 그 때 국내로 붙잡혀 간 사촌형 김동삼의 1심 재판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1932년 12월 23일 신의주지법에서 개정된 재판정에 아픈 몸을 이끌고 참관하였다. 이후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도우며 생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장식의 활동에 대한 일제 측 문서(1921. 4. 7) [판형1]

 

⋮채영국⋮

|참고문헌|

「救國團檢擧」 1921. 4. 7,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매일신보』, 1921. 3. 20 ; 『동아일보』, 1921. 3. 20, 1924. 10. 26 ; 『신한민보』, 1933. 1. 26 ; 재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 ; 조선총독부 경찰국,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1934.
  • 김장식에 대한 일제 측 문서(1921.4.7)
  • 김장식의 활동에 대한 일제 측 문서(1921.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