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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강인성 姜仁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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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강인성
한자명 姜仁聲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북 익산(益山)
생몰년월일 1897. 1. 13 ~ 1930. 8. 1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군산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5일 군산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2)

1897년 1월 13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웅포면(熊浦面) 대붕암리(大鵬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에 전북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 소재 영명학교(永明學敎) 재학 중이었다.

영명학교 전경(1910년대) [판형2]

1919년 3월 5일 군산(群山)의 만세 시위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李甲成)이 파견한 김병수(金秉洙)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1919년 2월 28일 구암리에 도착한 김병수는 박연세(朴淵世)의 집에서 예수교회 부속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 예수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 고석주(高錫柱) 등에게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전달하며 서울에서 3월 1일 만세 시위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렸다. 이 교사들은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해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구암리 예수교병원 사무원 이준명(李俊明)·양기준(梁基俊)·유한종(劉漢鍾)·양성도(楊成道), 군산 예수교 신자 김성은(金聖恩)·유희순(兪熙淳), 영명학교 학생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김영후(金永厚) 등과 함께 군산 장날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연명장(連名帳)에 서명하였다. 이어 김성은·유희순은 바로 군산부로 가서 박동근(朴東根)·정문선(鄭文善)·김영상(金永祥)·홍종억(洪鍾億)·전봉신(田奉信) 등과 만세 시위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

교사인 이두열과 김수영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1919년 3월 1일부터 4일까지 “조선이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 만들겠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영명학교의 등사판으로 복사하였다. 이렇게 군산 장날 시위 계획은 서울 천주교단이 직접 지방에 파견한 김병수와 영명학교 교사 등의 주도 아래 예수교병원 직원, 영명학교 학생, 기독교 신자 등을 동참시키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5일 시위 지도부였던 이두열·김수영·고석주·송정헌(宋正憲)·박연세 등이 군산경찰서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군산 장날을 하루 앞두고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학생, 기독교 신자 등과 함께 3월 5일 구암리에서 시작해 군산부 경찰서 앞 등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시위로 체포되어 1919년 3월 7일 구치감에 입감되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평화를 위해 개최된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국임을 알리려고 서울부터 13도에 걸쳐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조선 인민이 만세를 부른 것은 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제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프랑스·미국 등도 조선의 독립을 찬성하고 있어 조선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만세 시위에 동참한 것”이므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19년 12월 12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윤희⋮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4.30 ; 「판결문」, 고등법원, 1919.6.12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재소자신분카드」.
  • 강인성
  • 군산의 만세시위를 지도한 김병수
  • 영명학교 전경(군산, 1910년대)
  • 박연세
  • 강인성
  • 영명학교 전경(191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