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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원휘 金原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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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원휘
한자명 金原輝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호: 신재(信齋), 자: 광서(光瑞)
출신지 경상북도 의성(義城)
생몰년월일 1884. 7. 20 ~ 1950. 4. 15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경북노회
관련 사건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
주요 활동 3월 12일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 계획 및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84년 7월 20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의성읍(義城邑) 도동(桃洞)에서 김대화(金大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광서(光瑞)이고, 호는 신재(信齋)이다. 일찍이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1907년 대구 계성학교(啟聖學校)에 입학하였으며, 동시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의성군 안평면 괴산동교회의 조사(助事)로 시무하면서 경안노회(慶安老會)의 연락과 지도를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12월 21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3일 예정된 평양신학교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만세 시위 운동으로 입학식이 열릴 수 없었다. 평양의 독립 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3월 4일 평양에서 출발하여 귀향길에 올랐다. 귀향 도중 김천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알고 지내던 황금동교회의 조사 김충환(金忠漢)을 만나 김천과 의성에서 각각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는 의견을 나누었다. 3월 6일 고향으로 돌아와 3월 7일 비안면 쌍계동교회의 박영달(朴永達)과 괴산동교회의 목사 박영화(朴永和)를 만나 평양과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권유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영화의 아들인 대구 계성학교 재학생 박상동(朴尙東)이 3월 8일 대구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 를 가지고 귀향하였으므로 대구의 독립 만세 운동에 관한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이에 한국인으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박영화에게 만세 운동을 권유하여 3월 13일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3월 12일 괴산동교회의 목사 박영화·쌍계동교회의 영수(領袖) 박영신(朴永新)·교인 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 함께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약 200매를 제작하는 등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3월 12일 오전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 올라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을로 돌아왔다. 이에 마을에 있던 교인들과 동민들은 학생들을 맞이하여 곧바로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이날 정오 마을 주민 약 200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오후 4시경 의성경찰서에서 급파된 한국인 경부와 순사부장 각 1명이 비안주재소 경찰과 더불어 시위 주도자들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두 17명의 주도 인물이 붙잡혔고, 피신했던 박영화 목사는 경찰에 스스로 찾아가 독립 만세 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4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또 상고하였으나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던 중에도 수감자들에게 한국의 자주적인 역사의 필연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의 심한 고문으로 왼쪽 고막이 파열되어 죽을 때까지 청력을 회복치 못하였다.

 

출옥 후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1943년 5월 일제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단(日本基督敎, 朝鮮長老團)’을 출범시키고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朝鮮耶蘇敎, 長老會, 總會)’를 해산하였다. 이에 경북노회는 경동·경안노회(慶東)·(慶安老會)등을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회(日本基督敎, 朝鮮長老敎團, 慶北敎區會)’를 창립하였다. 당시 송천교회 당회장으로 있던 1943년 6월 당회를 폐지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규칙에 따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송천교회 장로회(日本基督敎, 朝鮮長老敎團, 松川敎會, 長老會)’로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회장을 맡고 있던 자신을 비롯한 당회원의 성명까지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꿔야 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광복 후 신앙생활에 헌신하며 신국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49년 5월 23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4) [판형1]

 

⋮권대웅⋮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 4. 14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4. 26 ; 「판결문」, 고등법원, 1919. 5. 2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 윤보현, 『영남출신독립운동략전』 1, 1961 ;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1992 ;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 Ⅲ- 3·1운동』, 경상북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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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4)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