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金容俊 |
한글명 | 김용준 |
---|---|
한자명 | 金容俊 |
본 관 | |
이 명 | |
출신지 | 경상북도 영주(榮州) |
생몰년월일 | 1873. 6. 13 ~ 1932. 7. 14 |
운동계열 | 3.1운동 |
관련 단체 | |
관련 사건 | 영주군 풍기면 만세시위 |
주요 활동 | 영주군 풍기면 풍기장터 독립만세시위 참여 |
포상훈격(연도) | 대통령표창(1995) |
1873년 6월 13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봉현면(鳳峴面) 대촌동(大村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영주군 풍기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주군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1일부터 4월 11일에 걸쳐 네 차례 일어났다. 풍기장터의 시위는 봉현면 대촌동에 거주하는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 등 20대 청년들이 최초로 기획하였다. 이 중 안용호는 평소에도 일제의 과다한 세금 부과에 불만을 품고 독립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안용호는 4월 3일 남영진 등과 함께 시위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풍기장날인 4월 9일을 결행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풍기시장은 장날이 되면 상리·순흥·봉현·안정·단산·부석 등지에서 6,000~7,000명의 주민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1919년 4월 9일이 되자 주도 인물들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쌀 시장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3시 이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선창하자 약 1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곧이어 주도 인물인 안용호·최성원·남영진이 풍기헌병주재소로 잡혀가자, 시위대는 잠시 흩어졌다. 황정흠(黃鼎欽)·남상필(南相弼)·이화백(李和伯) 등이 흩어진 시위대 전열을 가다듬을 때 함께 참여하였다. 이어 시장의 다른 쪽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주민들을 독려하면서 약 50명의 주민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던 헌병들이 재차 진압에 나서면서 이 시위 대열 역시 해산되고 말았다.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만세시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진압되었다.
이 시위로 붙잡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풍기시장 3. 1운동 만세시위지(경북 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