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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하 金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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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하
한자명 金永河
본 관  
이 명 창씨명: 금해영치(金海永治)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919. 3. 3 ~ 2015. 5. 24
운동계열 학생운동
관련 단체 조선학생동지회, 원산상업학교
관련 사건 1942년 학생시위운동
주요 활동 1939~1941년 조선학생동지회 경상도 책임자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19년 3월 3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순흥면(順興面) 석교리(石橋里)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금해영치(金海永治)이다.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재학 중인 1939년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서울 사직동(社稷洞)에 있던 도정궁(都正宮)에서 동교생(同校生) 김상흠(金相欽)·서영원(徐泳源)·윤주연(尹柱淵)·김재황(金在璜)·이동원(李東元)·민영로(閔泳魯) 등과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 대표 백재호(白在鎬) 등과 함께 학생 항일결사인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국내의 주요 도시를 비롯해 도쿄 등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도 하부조직을 구축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경상도 책임자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학생동지회는 1919년 만세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여 1942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국내외에서 일제히 ‘조선독립선언문(朝鮮獨立宣言文)’을 발표하고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 사이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서대문구 냉천정(冷泉町)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경기도 고양의 벽제관(碧蹄館) 등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 참여하여 동지 규합과 조직 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거사 계획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1941년 7월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元山商業學校) 조직원이 연락차 서울로 오다가 일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9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당하였다. 이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함흥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같은 해 12월 19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3년 3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같은 해 8월 14일 출옥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는 공로를 인정하여 추가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광복 이후 영주중학교(榮州中學校), 영주여자고등학교(榮州女子高等學校) 등 교직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식 모습(1938) [판형1]

 

⋮변은진⋮

|참고문헌|

「朝鮮學生同志會略史」 (자체작성) ;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5.
  • 김영하_profile
  • 연희전문학교 졸업식 모습(1938)
  • 김영하(프로필사진)
  • 조선학생동지회 김영하 사진(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