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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후 金永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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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후
한자명 金永厚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북도 옥구(沃溝)
생몰년월일 1897. 4. 7 ~ 1948. 2. 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군산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5일 군산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3)

1897년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開井面) 아동리(阿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학생으로 3월 5일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25일, 전북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생도인 김병수(金炳洙)는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자 군산으로 내려왔다. 김병수의 권유를 받고 영명중학교 교사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박연세(朴淵世), 그리고 같은 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 고석주(高錫柱) 등이 만세운동 계획에 가세하였다. 교사들은 이외에도 3월 1일 학교·교회·병원에서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할 사람을 찾아 참여를 권유하였다. 영명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이 계획을 듣고 동의하여 참여를 결정하였다.

 

3월 1일부터 4일까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영명학교 등사판을 이용해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약 7천매를 복사하였다. 그러나 군산 장날을 맞춰 잡은 시위 하루 전인 3월 5일, 이들의 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중심 인물이던 영명학교 교사들이 군산경찰서로 잡혀가자, 시위 계획에 참여한 나머지 인물들은 즉시 거사를 일으키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하였다. 이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주도자들은 시위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다른 영명중학교 학생들과 여학교 학생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행렬에 참여하였다. 기독교 신도들과 일반 주민들도 합세하여 시내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의 수는 5백여 명에 이르렀다. 일부는 군산경찰서로 돌진하여 구금된 교사들의 석방을 외쳤다.

 

이처럼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 판결에 대해 “평화를 근본적으로 하려면 인민의 정도에 따라 자유 독립하게 하는 것으로, 반만년의 역사국인 한반도는 독립하여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상고했지만, 같은 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옛 군산경찰서 건물 [판형1]

 

 

판결문(고등법원, 1919. 6. 12) [판형1]

 

 

⋮고태우⋮

|참고문헌|

「이두열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4. 30 ; 「이두열 등 판결문」, 고등법원, 1919. 6. 1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제5권, 1973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Ⅱ-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판결문(고등법원, 1919.6.12)
  • 옛 군산경찰서 건물
  • 판결문(고등법원, 1919.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