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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재 金英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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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재
한자명 金英哉
본 관  
이 명 김세일(金世一, 金世日), 왕영재(王英哉), 김연일(金連日), 김철부(金鐵夫), 김철웅(金鐵雄), 김영재(金英載)
출신지 평안북도 용천(龍川)
생몰년월일 1911. 4. 5 ~ 1965. 7. 20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 단체 상해한인청년당,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관련 사건 윤봉길의거
주요 활동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운영된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생도와 제2·3기 교관, 1935년 이후 민족혁명당 당원,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여 제1구대 부 구대장, 1940년 제3지대 지대장으로서 중국군 제9전구에 배속되어 후난성과 장시성 지역의 항일전에 참가, 1942년 말부터 1945년까지 한국광복군의 기간요원 및 임시정부 직원으로 복무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11년 4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오송리(五松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김홍일(金弘壹)의 조카이다. 널리 알려진 이명은 김세일(金世一), (金世日), 왕영재(王英哉)이고, 김연일(金連日), 김철부(金鐵夫), 김철웅(金鐵雄)이라는 가명도 썼다.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2년 1월 김석(金晳)·서재현(徐載賢) 등과 함께 상해한인청년당(上海韓人靑年黨)을 조직하여 이사(理事)가 되었다.

 

1932년 2월 김구(金九)의 부탁으로 김홍일이 상하이 병공창장 송식표(宋式驫)에게 도시락 모양과 수통 모양 폭탄 10개씩을 만들어 주도록 의뢰할 때, 그 숫자만큼의 일본식 도시락과 수통을 구입하여 가져다주었다. 폭탄은 제조된 후 김구에게 전해졌고, 다시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의 주인공 윤봉길(尹奉吉)과 따렌의거(大連義擧)의 임무가 맡겨진 유상근(柳相根)·최흥식(崔興植)에게 제공되었다.

 

1932년 의열단(義烈團)이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의 제1기생으로 입학·입단하고, 같은 해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난징(南京) 교외 탕싼(湯山) 동쪽의 선사묘(善祠廟)에서 교육받았다. 졸업 후 난징성 내 명양가(鳴羊街) 효자방(孝子方)의 단원 합숙소에 기거하면서 각지 의열단원과의 통신연락 활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 9월부터 장쑤성(江蘇省) 캉닝시엔(康寧縣) 캉닝친(鎭)의 증조사(曾祖寺)에서 개설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교육과정의 생도대 구대장 겸 교관이 되어 기관총학과 야간연습 과목을 가르쳤다. 1935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캉닝시엔 상팡친(上方鎭)의 천녕사(天寧寺)에서 운영된 제3기 때도 생도대장 겸 교관이 되어 보병조전, 기관총 해부학, 야외근무 및 연습 과목 등을 가르쳤다.

 

1935년 중국공군비행학교에 들어가 훈련 받고 기계사(機械士) 자격을 얻었다. 동년 7월 결성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군사학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4월 김원봉(金元鳳)의 추천으로 양민산(楊民山)과 함께 장시성(江西省) 싱쯔시엔(星子縣)의 남의사(藍衣社) 고등훈련소에 입소하여 특훈반 제4기 과정을 이수하였다. 1937년 2월에 수료하고 난징으로 돌아왔다가 민족혁명당 광둥(廣東)지부로 파견되어 일하였다.

 

1938년 10월 후뻬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립될 때 참여하여 제1구대 대부(隊附, 즉 부 구대장)로 임명받고 중국군 제9전구(戰區) 사령부로 배속되었다. 10월 22일 한커우를 떠나 전구사령부가 있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 12월 일본군의 창사 침공에 중국군이 초토항전책(焦土抗戰策)으로 맞서면서 창사를 방화하여 일본군을 퇴각시킨 후, 대화재로 인한 이재민 구호 및 도시복구 사업에 1개월간 참여하였다. 이어서 1939년 1월 말에 전선으로 나가서 막부산맥(莫府山脈)의 오동산(梧桐山) 진지에 배치되었다. 1939년 9월부터 11월까지 후난성 헝양(衡陽)에서 구대 강화훈련이 실시된 후의 부대개편 때 제1구대 병력의 절반과 신입대원들을 혼합하여 63명 인원의 제3지대가 신설되자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대본부의 명령에 의해 장시성 방면에서 충칭(重慶)으로 들어갔고, 11월에 열린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의 ‘북상항일’ 결의에 따라 1941년 1월 충칭을 떠나 화뻬이(華北) 진출을 목표로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으로 떠났다. 출발 직전에 제1지대장이던 박효삼(朴孝三)이 제3지대장으로 전임되면서 부지대장으로 강임되었고, 김원봉이 가장 신임하는 박효삼·윤세주(尹世胄)·양민산 3인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화북특파원으로 임명받았다.

 

1940년 3월 뤄양에서 합류한 제1지대와 혼성지대를 만들 때 이춘암(李春岩)과 함께 부지대장이 되었다(대장은 박효삼). 그러나 황허(黃河)를 건너 화베이로 진출하는 다수 대원들의 행보와는 달리 뤄양에서 충칭으로 돌아갔다. 1942년 조선의용대(본부)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1지대로 편입되자, 1지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후일 총사령부로 전임되어 근무하였다.

 

1944년 6월 임시정부 선전부(宣傳部)의 총무과 과원으로 발령받았다. 미군과 합작으로 필리핀에 공군훈련소를 설립하고 중국내 한인 비행사·기계사와 훈련소 수료자들로 광복군 예하의 한국항공대를 편성하여 미국 공군과 연합작전을 편다는 요지의 한국공군 창설계획의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3월 영국군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강화를 위해 증파키로 한 광복군 대원 5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출발 전에 영국군의 버마탈환작전이 종료됨으로써 증파가 취소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거주하다 1965년 7월 2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자 관련 일제 측 보고(1936. 8. 24) [판형1]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소 터(중국 난징) [판형1]

 

 

⋮김영범⋮

|참고문헌|

조선총독부 경무국, 『용의조선인명부』, 1934 ; 「조선혁명간부학교(군관학교) 졸업자 송국에 관한 건」, 1936. 8. 24 ; 조선의용대의 내용에 관한 건」, 1939. 6. 29(이상 『사상에 관한 정보철』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1968 ; 사회문제자료연구회 편, 『사상정세시찰보고집』 제2·3·9집, 京都: 東洋文化社, 1976 ;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4, 1988 ; 국가보훈처,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Ⅷ, 1993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6·11·33, 2005~2009 ; 『구망일보』 1940. 2. 4 ; 崔鳳春 역, 『조선의용대 혈전실기』, 밀양문화원, 2006 ;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 楊昭全·이보온 편, 『조선의용군항일전사』, 고구려, 1995 ;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 김영범,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역사공간, 2013 ; 김영범, 「조선의용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 홍윤정, 「독립운동과 비행사 양성」, 『국사관논총』 107, 2005 ; 崔鳳春, 「석정 열사와 조선의용대(군)의 동지들」, 『조선의용대(군)와 석정 윤세주』 (학술회의 발표문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사)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 2011.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자 관련 일제 측 보고(1936.8.24)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자 관련 일제 측 보고(1936. 8. 24)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소 터(중국 난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