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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영백 金永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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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영백
한자명 金永伯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남도 장성(長城)
생몰년월일 1880 ~ 1910. 5. 3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김영백 의진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7∼1909년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고부·흥덕 등지에서 항일 의병투쟁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82)

1880년 9월 3일 전남 장성군(長城郡) 북이면(北二面) 달성리(達城里)에서 태어났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그 해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고향에서 동지 박화옥(朴化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스스로 대장이 된 뒤 부대를 편성하였다. 총 200정을 준비하고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정읍·부안·흥덕·고창의 각 고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 공격하였고, 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方丈山) 산록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헌병,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전투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군 오현(鰲峴)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 말경 북이면 상곡리(上谷里)에서 수비대 기병과, 2월 중순에는 북일면(北一面) 동산리(東山里)에서,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 4월 11일에는 같은 군 일동면(一東面) 구수교(九水橋),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一南面) 유점리(鍮店里)에서 각각 일본 헌병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4월 18일 김영백 의병부대 70여 명이 광주헌병대 장성분파소에서 파견한 일본군 하사 1명, 병사 3명, 헌병보조원 9명으로 구성된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의병 9명이 사망하고 탄약과 잡품 다수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24일에는 소속 의병 약 29명이 장성군 북상면 새재에서 약수정(藥水亭)파견소 헌병 2명, 보조원 4명과 교전하여 의병 1명이 전사한 끝에 퇴각하기도 하였다.

 

1909년 9월과 10월 호남지역 일대에서 일제가 벌인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많은 의병들이 학살되거나 붙잡혔다. 이때 일시 피신하였으나, 잔여 의병에 대한 일제의 수색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 해 12월 적에게 붙잡히기 직전 일본헌병대 고부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자, 몇 차례 항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1910년 5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순권⋮

|참고문헌|

전라남도 경무과 편, 『全南暴徒史』, 1913 ; 황현, 『매천야록』, 1971, 국사편찬위원회 ; 김승학 편저, 『한국독립사』 下卷,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4 ; 『步兵第14聯隊陣中日誌』,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박물관, 2010 ;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창작과비평사, 1980 ;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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