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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연배 金年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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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연배
한자명 金年培
본 관  
이 명  
출신지 제주(濟州)
생몰년월일 1896. 7. 15 ~ 1923. 11. 26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제주 신좌면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21~24일 제주 신좌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3)

1896년 7월 15일 태어났다.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 출신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조천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조천리에서 제일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에서 귀향한 김장환(金章煥)으로부터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조천리에서도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김장환은 조천리의 유림 김시범(金時範)의 조카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휴교령에 따라 3월 16일 제주로 내려왔다.

 

김장환에게 독립선언서는 물론 서울에서의 시위 상황에 대한 정보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 1919년 3월 17일 김시범, 김장환을 비롯하여 김시은(金時殷)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고재륜(高載崙), 김용찬(金容燦), 김형배(金瀅培), 황진식(黃鎭式), 김경희(金慶熙)등과 함께 이 시위 계획에 가담하였다. 거사일은 유학자인 김시우(金時宇)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

 

1919년 3월 21일 김시범, 김시은과 앞장 서 인근 주민과 서당 학생 등 약 5~6백명을 이끌고 조천리의 미밋동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신촌리를 행진하던 중 조천경찰관주재소와 제주경찰서에서 출동한 30여 명의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 주도자들을 포함한 13명이 붙잡혔다. 다음날인 3월 22일에는 조천 장터에서 백응선(白膺善), 박두규(朴斗圭), 김필원(金弼遠)을 비롯하여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전날 붙잡힌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주도자들이 경찰에 붙잡히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틀간의 만세시위에서 체포를 면하자, 3월 23일 백응선, 이문천(李文千) 등과 함께 3차 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천리 신작로에서 함덕리(咸德里)에 이르는 길에 운집한 8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조천 장날인 3월 24일에는 장터에서 1,5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4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는데, 그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연배 생가 터 전경(제주 조천) [판형1]

 

김연배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고태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5. 29 ; 『수형인명부』, 대구복심법원, 1919. 5. 2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매일신보』 1919. 5. 1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Ⅱ-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李龍洛, 『三·一運動實錄』, 三·一同志會, 1969 ; 金東栓, 「濟州人의 3·1運動과 그 영향」, 『耽羅文化』 16, 1996 .
  • 김연배_profile
  • 김연배 생가 터 전경(제주 조천)
  • 김연배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 김연배(프로필 사진)
  • 김연배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뒷면(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