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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양순 金良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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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양순
한자명 金良順
본 관  
이 명  
출신지 충청남도 아산(牙山)
생몰년월일 1881. 12. 9 ~ 1936. 1. 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신창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4월 2일 아산군 신창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8)

1881년 12월 9일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新昌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아산 지역에서는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독립 만세를 불렀고, 3월 14일 온양장터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군중에게 뿌려지면서 공립보통학교 학생 100여 명과 장터에 모인 군중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신창면에서는 박민성(朴敏成)이 3월 18일 오후 1시쯤 신창시장에서 조명원(趙溟元)과 이상균(李祥均)을 만나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하였고, 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안기(金安基)에게도 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4월 1일 밤 8시 신창면·탕정면·염치면·대방면·온양읍·둔포면 내 각 마을 산 위에서 일제히 횃불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아산 만세 시위 관련 보도(『매일신보』 1919.4.5) [판형2]

4월 2일 밤 8시경 이덕균(李悳均)·박진화(朴鎭和)·정윤흥(鄭允興)·손천일(孫千日)·김금복(金今福)·강순화(姜順和)·김원배(金元培)·승일상(承一相)·이상균(李相均)·김학삼(金學三)·김상준(金相俊)·신흥남(辛興南)·이창균(李昌均)·강복개(姜福介)·강달성(姜達成) 등과 함께 읍내리와 오목리 주민 약 200명을 이끌고 학성산(鶴城山)에 올라가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때 이덕균이 “관청을 파괴하자”라고 외치자 이에 호응한 군중은 학성산에서 돌을 주워 내려왔다. 이들은 면사무소로 가서 정윤흥 등의 주도하에 돌을 던져 문 2짝을 파괴하였다. 밤 9시경 100여 명의 군중은 헌병주재소로 이동하였고, 그 가운데 15명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돌을 던져 문등(門燈) 유리를 깨뜨렸다.

그리고 강순하·손천일·김금복 등 40~50명과 함께 그날 밤 10시경 선장면 공립보통학교로 가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교장 무네 카타(宗方喬)가 나와서 만세를 부르지 못하게 제지하자 시비가 일어났다. 이때 박진화를 선두로 군중이 학교 건물을 향하여 돌을 던져 유리창 272장과 문 4짝을 파손하였다. 일본 헌병 7명과 보병 3명이 출동해 발포하며 군중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3일 소위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다시 상고하였고, 1919년 9월 6일 고등법원이 이를 다시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성구⋮

|참고문헌|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1919.5.2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6.28 ; 「판결문」, 고등법원, 1919.9.6 ; 『매일신보』 1919.4.5·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3,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조형열, 「근대 이후 지역 상황을 통해 보는 牙山의 3·1운동」,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32-1,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 김진호, 「아산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 『한국근현대사연구』 75, 한국근현대사학회, 2015.
  • 아산 만세 시위 관련 보도(『매일신보』 19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