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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수동 金守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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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수동
한자명 金守東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昌原)
생몰년월일 1877. 8. 26 ~ 1919. 4. 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참여했다가, 총에 맞아 사망함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77년 8월 26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진전면(鎭田面,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동산리(東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동면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일제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1919년 4월 3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에서 전개된 연합 만세 운동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된 시위였다. ‘삼진의거(三鎭義擧)’라고 불리는 이 만세 운동은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서 활동한 변상태(卞相泰)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변상태는 3월 28일 고현면(古縣面) 고현시장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4월 1일부터 변상섭(卞相燮)·권영대(權寧大) 등과 함께 삼진의거를 준비하였다. 변상태 등은 구한국기(舊韓國旗)를 만들어 주민에게 배포하는 한편, 진전면과 진북면 각 마을을 다니며 구장들에게 권유해 다수의 주민이 시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위 당일인 4월 3일 오전 9시경 진전면 양촌리(陽村里) 냇가에는 높이 솟아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변상태의 연설에 이어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변상태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진동헌병주재소(鎭東憲兵駐在所)와 진동우편소(鎭東郵便所)가 있는 읍내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시위 대열이 지나가는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만세 소리를 듣고 합류하였다. 오후 2시경 사동리(社洞里) 사동천교(社洞川橋)에 도착했을 무렵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서는 일본 헌병과 보조원 및 재향군인 30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때 시위대 선두에 서서 헌병 등과 밀고 당기는 몸싸움을 벌였다. “너희가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민의 정혈(精血)을 흡취(吸取)하니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다”라고 외치며, 제지하는 헌병을 다리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자 헌병들이 즉각 발포하였다. 이때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더불어 이날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7명을 가리켜 ‘8의사(八義士)’라고 칭하였다.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산자락에 조성된 「8의사지묘(八義士之墓)」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참고문헌|

「판결문(권영대 외 8인)」, 부산지방법원, 1919.11.6 ; 「판결문(변상태 외 9인)」, 경성복심법원, 1920.10.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김봉렬, 「마산 삼진의거의 3·1운동사적 고찰」, 『경남지역문제연구총서』, 2003 ; 남부희, 「일제의 침략과 창원 3·1운동」, 『창원 600년사』 제1권, 창원문화원, 2009 ; 「高 第9833號, 獨立運動에 관한 건(제37보)」, 1919.4.4,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朝鮮總督府 內秘補 467 ; 慶南地親202號, 騷擾ニ關スル件第四報」, 1919.4.7, 『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スル道長官報告綴 7冊ノ內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양촌리 강변 3.1운동 만세시위지(경남 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