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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세준 金世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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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세준
한자명 金世俊
본 관  
이 명 김정치(金正治), 김자열(金子烈)
출신지 강원도 철원(鐵原)
생몰년월일 1897. 5. 4 ~ 1961. 12. 21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 단체 북경군사통일회의, 북경한교동지회, 정의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 군사위원, 1923년 국민위원회국민위원, 1924년 북경한교동지회조직, 정의부, 1937년 이후 장쯔종(張自忠) 부대의 소장급 참모장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8)

1897년 5월 4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월하리(月下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정흡(金正洽), 김자열(金子烈) 등이 있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항저우(抗州)의 절강체육전문학교 제3기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닝보(寧波) 경찰청과 항저우시 소방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에 다시 상하이(上海) 조선인보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6년 이범석(李範奭)·최진(崔震, 일명 崔胤東) 등과 함께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 12기 포병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21년 4월 20일부터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신숙(申肅)과 박용만(朴容萬)이 주도한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에서는 각지 군사대표를 소집해 군사 통일 방법을 협의하였다. 회의 준비과정에서 군사위원, 서무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고, 본 회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을 성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한 후 이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하였다. 6월까지 진행된 군사통일회의에서 김천호(金天浩)·박승선(朴承善) 등과 하와이국민군 대표로서 참가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고 국민대표소집방법안을 결의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방략을 취하였다.

정의부 직원 임명에 관한 일제 측의 보고(1925.4.8) [판형2]

1923년 1월 3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개혁 방향을 논의하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다. 기존의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주장이 맞서 회의는 결렬되었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6월 초 창조파가 독자적으로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을 때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4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인 원세훈·윤해·신숙·박용만 등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소련 측의 반대로 3월경 중국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겨 민족유일당 조직 방안을 모색하면서 1924년 6월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으로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공포하였다. 그해 7월에 원세훈과 신숙 등이 발의해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하자, 일반회원으로 동참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는 국치(國恥)에 대한 자기반성과 각국에 한국 독립 지원 호소 등에 대한 선전 활동도 전개하였고, 1925년 3월 『앞잡이』란 신문도 창간하였다. 또한 1925년 7월에는 자신들의 주장과 주의를 대변할 『도보(導報)』를 창간하고 앞잡이사도 설립하였다. 원세훈이 주간이었고 조남승·한흥 등과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11월 만주에서 8개 단체가 합병하여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서 군사부 군사과 주임위원의 중요간부직을 담당하였다. 1925년 4월 4일 배천택(裵天澤)·한진산(韓震山)·유청우(柳靑宇)·서왈보(徐曰甫)·서동일(徐東日)과 함께 비밀결사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고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집 등을 활동 목표로 세우고 취지서와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1924년 리대소의 주선으로 펑위샹(馮玉祥)이 장자커우(張家口)에 세운 서북육군간부학교(西北陸軍幹部學校)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펑위샹 휘하에서 북벌전에 참가하였고, 이후 장개석을 반대하는 중원대전에 참가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으로 시작된 중국 대일항전 시기 송저위안(宋哲元) 부대의 독립 제25여단 상교참모장(上校參謀長)으로, 또 장쯔종(張自忠) 부대의 180사단 소장급 참모장으로 노구교전투, 대아장(臺兒莊)전투, 쉬저우(徐州)전투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는 후베이성(湖北省) 짜오양(棗陽) 남과점(南瓜店)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1940년 장쯔종이 희생된 후 일선 부대를 떠나 국민당 후근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베이징에 머물다 1961년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양지선⋮

|참고문헌|

「國外情報 : 北京 不逞鮮人의 軍事統一會議」, 1921.7.20,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민위원회의사록에 관한 건」, 1924.11.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正義府 職員 任命에 關한 件」, 1925.4.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不逞鮮人의 行動에 관한 件」, 1925.7.2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경상북도경찰부, 『高等警察要史』, 1934 ; 일본정부외무성, 『韓國民族運動史料』 1, 국회도서관, 1979 ; 김정명 편, 『朝鮮獨立運動』 Ⅱ, 東京: 原書房, 1967 ; 『동아일보』 1926.2.18 ; 北京市文史研究館 編, 『北京文史資料選集』 第77輯, 北京市文史研究館, 2011 ; 조규태, 「北京 ‘軍事統一會議’의 組織과 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 박환, 「1920년대 중반 북경지역 다물단의 성립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 조철행, 「국민대표회 전후 민족운동 최고기관 조직론 연구」, 고려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 임경석, 「국민대표회의 폐막이후 창조파의 동향」, 『東方學志』 16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3.
  • 정의부 직원 임명에 관한 일제 측의 보고(19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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