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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성철 金成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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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성철
한자명 金成哲
본 관  
이 명 김성관(金成觀)
출신지 평안북도 용천(龍川)
생몰년월일 1923. 8. 14 ~ 1999. 9. 19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한국광복군 3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광복군 제3지대에서 OSS훈련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23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용천면(龍川面, 용암포읍으로 개칭) 용암동(龍岩洞)에서 태어났다.

1945년 초 베이핑(北平, 현 베이징)에서 차성훈(車聖勳)·조대훈(趙大勳)·이철민(李鐵民)·이창도(李昌道)·이아청(李鴉靑)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제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본부를 두었고, 대원들은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 등지로 나가 비밀 공작을 수행하였다. 쉬저우 등지에 배치된 일본군 부대에는 1944년 1월 일제의 ‘학도병제’에 의해 많은 한인 학도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제3지대원들은 이들 학도병의 탈출을 도모하여 광복군의 기간병으로 삼고자 하였다.

1945년 4월 하순 미국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 OSS) 무전훈련반에 선발되어 푸양현 산타지(三塔集)에 있는 지대본부로 복귀하였다. OSS 무전훈련반은 광복군이 미·영·중 연합군과 합동작전을 준비하면서 한반도 상륙작전을 위해 편성한 훈련반이었다.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과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의 호응과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할 계획이었다. 당시 OSS 훈련반에는 제3지대원 24명이 선발되었는데, 총책임자 엄도해(嚴道海), 훈련대장 윤영무(尹永茂) 외 대원 김영일(金永逸)·김용관(金容寬)·한이윤(韓伊尹)·이영순(李英淳)·이철민(李鐵民)·차성훈(車聖勳)·이창도(李昌道)·김하진(金夏鎭)·오성규(吳成奎)·조승희(趙昇熙)·이신성(李信成)·조대균(趙大均)·정길주(鄭吉胄)·전형운(田瀅雲)·변수정(邊守靜)·이창배(李昌培)·김용인(金龍吝)·김성환(金成煥)·이아청(李雅靑, 이한기(李漢基)) 등 22명이었다. 그 외에 훈련소와 지대 본부와의 연락 및 보급 지원 등을 위해 연락 장교 김군남(金君南)과 조병팔(趙炳八) 등이 동행하였다.

5월초 푸양을 떠나 5월 상순 리황(立煌) 우자뎬(吳家店) 비행장 근처 미군 막사에 여장을 풀고 3개월 교육 훈련에 들어갔다. 교육과정은 정보 교육·무전통신 교육·게릴라 유격전술 교육 등이었다. 정보학·독도법·첩보 수집 방법·무전기 조작법·송수신방법·암호문 해독법·무기 조작법·폭약 사용법 등을 교육받았고, 게릴라작전에 필수적인 파괴·폭파·납치·민중 선동·암살에 관한 특수 훈련과 공중 낙하 훈련도 이수하였다.

교육 훈련 수료 후 미군과 협력하여 잠수함 등을 이용하여 국내에 침투한 뒤 애국적 민중을 포섭 조직하여 활동 거점을 구축하고 전략정보, 일본군 병력 및 군사시설, 연합군 상륙지점 등을 연합군에게 제보하고, 상황에 따라 독자적으로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게릴라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3개월의 훈련 과정이 마무리되자 훈련대원들은 본적지 별로 조를 편성하고 광복군 제3지대의 국내 정진특공대를 조직하는 등 만반의 출정 준비를 마치며 출동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기 때문에 국내 침투 작전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OSS 훈련대원들은 기쁨과 동시에 허탈함을 느꼈다고 한다.

부대로 복귀한 후 쉬저우 지구 특파단으로 파견 근무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의 참모 진영은 8월 15일 오후 이복원(李復源) 부지대장을 중심으로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8월 16일 한국광복군 군사특파단 파견 계획을 채택하였다. 군사특파단은 중국인들의 폭력으로부터 교민 보호와 안전 귀국, 형무소에 수감 중인 동지 구출, 중국군의 일본군 무장해제 공작 협조, 일본군 출신 한인 사병 인수와 광복군으로 편입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당시 쉬저우 지구 특파단은 단장 변영근(邊榮根), 부단장 최광성(崔光星), 단원 윤태훈(尹泰勳)·엄일청(嚴一靑)·김진동(金鎭東)·이윤하(李允河)·변수정(邊守貞)·이창도(李昌道)·박성관(朴成官)·최이옥(崔伊玉)·김용희(金龍熙)·서삼례(徐三禮)·박지영(朴芝榮)·김기창(金基昌)·김승조(金承祚)·최시화(崔時華)·유순희(劉順姬)·박문자(朴文子)·김군남(金君南)·임일옥(林一玉)·이복순(李福順)·박금녀(朴金女) 등이었다. 이후 중국의 국공(國共) 내전과 국민당 정부의 광복군 복원령(1946.5.16)에 따라 쉬저우 특파단이 해산하자, 쉬저우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1999년 9월 19일 향년 76세에 안산시 원곡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여성구⋮

|참고문헌|

『동아일보』 1999.9.21 ; 『경향신문』 1999.9.21 ; 『한겨레신문』 2010.4.17 ; 『매일경제』 2015.8.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6권, 1975 ; 김문택, 『새벽으로 가는 길』,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5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김성철(프로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