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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세영 金世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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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세영
한자명 金世榮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盈德)
생몰년월일 1889. 5. 21 ~ 1979. 3. 4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경북 영해읍 만세시위 주도 계획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89년 5월 21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에서 태어났다. 영덕군에서 만세 시위를 최초로 추진한 인물이며 기독교인이다.

1919년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의 조사(助事)로 활동 중 교회의 도움으로 장로교 선교사 새뮤얼 모펫(Samuel A. Moffet, 馬布三悅)이 세운 평양신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도중에 서울에 머물던 중 3·1운동을 목격한 데다 평양에서도 만세 시위로 인해 휴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시위를 기획하였다.

3월 12일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한 까닭에 한국 민족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려고 서울·평양·대구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전하였다. 또한 영덕에서도 만세 시위에 나서 달라고 요청하고, 병곡면 송천동의 장로교회 조사인 정규하(丁奎河)와 상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권태원은 정규하와 함께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 지방의 기독교인과 유림 등을 설득하면서 영해 장터에서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18일 영해 장터에서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군 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면·남정면(南亭面)·지품면·영해면·병곡면·창수면(蒼水面)의 6개 면에서 전개되었다. 영덕의 만세 시위는 경북에서 가장 격렬했던 것으로 평가되며, 그중에서도 북부 지역인 영해면·창수면·병곡면의 시위가 치열하였다.

3월 13일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에 검거되어 18일의 만세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6.5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대구경북 항일 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朴慶植, 『朝鮮三·一獨立運動』, 平凡社, 1976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경북독립운동사 Ⅲ 3·1운동』, 경상북도, 2013 ; 송현강, 「영남 지역 기독교유적지 연구」, 『考古와 民俗』 13, 2010.
  • 김세영(프로필 사진)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