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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두영 金杜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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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두영
한자명 金杜榮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남도 창녕(昌寧)
생몰년월일 1898. 11. 16 ~ 1964. 12. 15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13일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23인의 결사대로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2)

1898년 11월 16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서리(西里)에서 태어났다. 영산면의 영산보통학교 3회 졸업생으로, 1919년 당시 장마면(丈麻面)의 면서기였다.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동생인 김금영(金今榮)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동한 23인의 결사대로 참가하였다.

영산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지역 출신인 구중회(具中會)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구중회는 서울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해 지방에서도 만세 시위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청년동지를 규합함과 동시에 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찬동한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시위의 계획 단계부터 가담하였다. 남경명(南景明) 등과 함께 의거 일을 3월 13일로 정한 뒤 야간을 이용하여 목판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큰 깃발 등을 준비하였다.

3월 12일 밤 구중회의 집에 22명과 모여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1시경 결사대원과 함께 영산면 남산(南山)에 집결하여 일보라도 후퇴한다면 생명을 빼앗긴다는 의미로 ‘결사단원서’에 함께 서명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모여든 군중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 독립 만세와 전진가(前進歌)를 부르며 남산에서 내려왔다. 사전에 시위 정보를 입수해 출동한 일제 경찰과 시위대가 남산 밑 만년교에서 충돌하자 주변 군중이 가세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큰 북과 징을 울리며 영산면을 누볐고, 시위대 600~700명과 행진하였다.

저녁 무렵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 주동 인물이 붙잡혔다. 체포를 피한 결사대원과 함께 구속된 동지들을 탈환하기로 결의하고 저녁 8시경 남산에 재집결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대와 함께 창녕읍으로 행진하였다. 그러나 경찰에 결사단 전원이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가 항소를 제기하였고,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참고문헌|

「판결문(남경명 외 19인)」, 대구복심법원, 1919.6.1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3, 1971 ; 이정은, 「창녕군 영산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김두영(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