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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도치 金道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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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도치
한자명 金道致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盈德)
생몰년월일 1874. 8. 8 ~ 1927. 3. 27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19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74년 8월 8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인량동(仁良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영덕 지역에서의 3·1운동은 3월 18일에 일어난 영해면(寧海面)의 대규모 독립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군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면·영해면·창수면·병곡면(柄谷面)·남정면(南亭面)·지품면(知品面) 등 6개 면에서 일어났다. 영덕군 내 최초의 시위인 영해면의 만세 시위는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의 조사(助事)로서 교회의 도움을 받아 새뮤얼 모펫Samuel A. Moffet(馬布三悅)이 세운 평양신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던 김세영(金世榮)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일어난 거국적인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는 유학을 포기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권태원(權泰源)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김세영은 권태원을 만난 이튿날인 13일에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에 바로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권태원은 정규하(丁奎河) 등과 만나 영해면·병곡면·창수면·축산면(丑山面) 등지의 기독교인과 유림 세력 등을 규합하면서 시위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창수주재소 터(경북 영덕) [판형2]

3월 18일 오후 1시경에 영해면 성내동(城內洞)장터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영해면 북서쪽에 위치한 창수면의 삼계동(三溪洞)과 오촌동(梧村洞) 주민 10여 명도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일행이 신기동(新基洞)에 이르렀을 때 영해까지 가기에는 이미 늦었으니 창수경찰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리고는 신기동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과 협의한 후 주민들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19일 이현설·권재형(權在衡)·이현우(李鉉祐)·김치운(金致雲)·이현석(李鉉奭) 등이 이끄는 200여 명의 군중이 창수경찰주재소 부근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사무실, 객사, 주임순사의 숙사 벽과 천장 등을 파괴하였으며, 건물 내 집기와 공문서 등을 파손하였다. 또한 주임순사와 한국인 순사보들이 마을 곳곳에 숨겨둔 여러 잡물과 서적들을 찾아 파괴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7시경에 철수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은 만세 시위 주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그 결과 1차로 김세영 등 96명, 2차로 남응하(南應夏) 등 7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검사의 심문에 대해 19일 당시 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사무실 벽을 파괴하였으며 서류 및 의류 등을 파기하였다고 진술하였다.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모두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6.5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3·1운동사(하),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대구경북 항일 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경북독립운동사』 Ⅲ 3·1운동, 경상북도, 2013.
  • 만세운동이 있었던 창수주재소 터(경북 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