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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두배 金斗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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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두배
한자명 金斗培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909. 2. 1 ~ 1928. 9. 9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참의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7년 참의부 유격대 부대장, 1928년 군자금 모집 중 전사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02)

1909년 2월 1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단산면(丹山面) 병산리(幷山里)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5월경 재만(在滿) 독립군단(獨立軍團)인 참의부(參議府) 특파대원 김용재(金用才)가 이끄는 유격대에 가담하였다. 1924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로 성립된 참의부는 다른 독립군단들보다 한층 항일 무장투쟁을 주 노선으로 한 군단이었다. 참의부가 성립될 당시 대부분의 재만 독립군단들은 이주 한인의 삶을 이끌기 위한 자치와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 무장 활동을 거의 같은 비율로 실시하며 운영되었다. 참의부 또한 관할 지역으로 획정한 지역 내 한인을 위한 자치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항일 무장 활동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 군단을 이끈 참의장 채찬(蔡燦, 일명 백광운(白狂雲)) 자신이 강력한 무장투쟁론자였다. 이에 참의부는 국내와 접한 압록강변인 지안현(輯安縣)에 본부를 설치하고, 인접 지역인 환런(桓仁)·퉁화현(通化縣) 등에 여러 산하부대를 배치해 수시로 유격대를 파견해 국내 진입전을 실시하였다. 김용재의 경우도 이 같은 본부의 노선에 부합해 국내에 특파된 특무요원이었다.

김두배 전사 보도(『중외일보』 1928.10.20) [판형3]

1927년 5월경 김용재는 소백산 자락인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영춘면(永春面) 남천리(南川里)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동지를 모집하였다. 이때 유격대에 가입하여 부대장이 되었다. 함께한 대원들은 김찬섭(金燦涉)·김의엽(金義葉)·신도근(辛道根)·김현구(金顯九)·박경화(朴敬化)·조군옥(趙君玉)·노송영(盧松永) 등이었다. 유격대 부대장으로 이들 7명의 대원들과 충북·경북·강원 지역을 돌며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20세를 전후한 대원들이었기에 신속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여 10여 곳 부호들의 집을 찾아가 상당한 액수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대원 중 김찬섭을 비롯한 3명이 1927년 12월 붙잡혔다. 붙잡힌 대원들을 신문해 정보를 입수한 단양경찰대가 대규모 병력으로 수색작업을 벌이며 추적하였음에도 나머지 대원들은 계속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1928년 9월 초 박경화·조군옥 등 4명의 대원이 또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 김용재와 단 둘만 남게 되자, 소백산 깊숙이 들어가 몸을 은신하였다. 그러나 단양경찰서 소속 일본인 경부보 히라시키(平識)가 부하들을 이끌고 계속 추격해왔다. 결국 1928년 9월 9일 소백산 형제봉에서 이들 경찰대와 교전을 벌이다 두 사람 모두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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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신한민보』 1928.11.22 ; 『조선일보』 1928.10.20 ; 宋相燾, 『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56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中國東北지역 韓國獨立運動史』, 集文堂, 1997.
  • 김두배 전사 보도(『중외일보』 192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