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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시곤 金時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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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시곤
한자명 金時坤
본 관 김해(金海)
이 명 호: 한천(汗泉)
출신지 전라남도 제주(濟州)
생몰년월일 1901. 7. 19 ~ 1983. 9. 21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혁우동맹
관련 사건 제주 해녀투쟁 사건
주요 활동 1930년 3월 비밀결사 혁우동맹 결성, 1932년 1월 제주 해녀항일투쟁 배후 지원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는 한천(汗泉)이다.

1901년 7월 19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구좌면(舊左面) 세화리(細花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부터 하도(下道)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30년 3월 구좌면 세화리에서 신재홍(申才弘)·문도배(文道培)·오문규(吳文奎)·강관순(姜寬順) 등과 함께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이념 아래 민족해방을 목표로 내세웠던 비밀결사이다. 혁우동맹을 중심으로 같은 해 8월 오문규 등과 모임을 갖고 면내 소년·소녀의 교양 방안을 논의하였다. 9월 형인 김시화(金時化)의 집에서 신재홍·오문규 등과 함께 농촌의 청년과 해녀 규합 방법을 협의하였다. 11월 다시 신재홍·강관순 등과 향후 제주의 사회운동 방략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구좌면 일대의 해녀 투쟁을 논의한 결과, 해녀들의 권익 옹호 투쟁 지원과 수탈 방지 및 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1인당 10원씩 헌금키로 결의하는 등 해녀 투쟁의 지원책을 마련하였다.

1931년 1월 동맹원 부대현(夫大炫)의 행동으로 혁우동맹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4월 혁우동맹을 해체하였다. 1931년 5월 강창보(姜昌輔)의 주도로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가 재결성되자, 7월경 구좌면 책임자 신재홍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 1월 해녀조합에 대한 지정판매제 반대 등 8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해녀 1,000여 명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전 제주도에 걸쳐 청년운동가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5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이송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같은 해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청년운동을 하였고,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부패하자 민주당에 입당하여 야당활동을 하였다. 1983년 9월 2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2.5.8, 12.11, 1933.2.8, 3.3 ; 제주해녀항일투쟁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1995 ;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문화원, 2005 ; 염인호, 「일제하 제주지방의 사회주의운동의 방향전환과 ‘제주 야체이카’ 사건」, 『한국사연구』 70, 한국사연구회, 1990.
  • 김시곤
  • 제주 혁우동맹 판결 보도(『조선중앙일보』 1933.6.6)[출판x, 웹사전 게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