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병환 金鉼煥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병환
한자명 金鉼煥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남도 밀양(密陽)
생몰년월일 1889. 2. 19 ~ 1947. 1. 16
운동계열 의열투쟁
관련 단체 교남교육회, 의열단, 밀양구락부, 밀양청년회, 밀양청년동맹, 신간회 밀양지회, 밀양차가인동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 밀양 인민위원회
관련 사건 밀양만세시위, 밀양폭탄사건, 경북의열단사건
주요 활동 1919년 밀양 만세시위 참여, 1920년 의열단의 국내 적기관 총공격거사계획 지원, 1925~1926년 경북의열단사건 연루, 1925~1931년 밀양 지역사회의 청년운동, 신간회운동, 1945년 해방 후 신국가건설운동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89년 2월 19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府內面) 내이동(內二洞)에서 태어났다.

1908년 3월 서울에서 영남지방의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조직된 계몽운동단체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회원이 되었다. 1913년 12월부터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測地課) 소속의 기수(技手)로 일하다가, 1916년 그만두고 내일동(內一洞) 장터 앞의 자기 집에 쌀가게를 차렸다. 1919년 3월 윤치형(尹致衡)·윤세주(尹世冑)의 주도로 밀양에서 만세 시위가 기획되어 준비 작업이 시작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2일 밤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 동지들이 모여 숙의(熟議)하도록 하는 한편, 윤치형이 ‘조선독립만세’를 써넣어 만든 큰 깃발과 태극기 수십 매를 숨겨주었다. 3월 13일 오후 1시경 개시된 만세 시위 때 2,000명 가량의 군중에게 종이 태극기를 배포하는 데 앞장섰다가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당한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김병환의 의열단 활동 관련 보도(『신한민보』, 1926.12.9) [판형4]

출옥 후 청년단체 밀양구락부(密陽俱樂部) 대표로 활동하고 있을 때인 1920년 4월 의열단(義烈團)에서는 제1차 국내 적기관 총공격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거사를 위해 같은 고향 출신이면서 중국 안둥현(安東縣, 지금의 丹東)의 의열단 연락원이던 이병철(李丙喆)이 거사용 폭탄 3개를 수수 가마에 몰래 숨겨 국내로 부친 뒤 자신이 직접 국내로 들어와 밀양에서 다시 이 화물을 수령하였다. 이병철이 수수 가마에 숨겨 두었던 폭탄 3개를 거사 때까지 보관해줄 것을 부탁하자, 쾌히 승낙한 뒤 가게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일제 경찰의 첩보망에 포착되어 동년 6월 중순부터 의열단원 대다수가 붙잡히면서 결국 7월 8일 그의 점포도 수색당한 끝에 폭탄이 적발되어 체포·압송되었다.

8개월여 동안 일제 경찰조사와 검사국 예심 과정에 혹독한 취조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1년 6월 21일 이른바 폭발물취체규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곧 취하하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4년 1월 출옥 후에도 의열단 국내 공작원으로서 정보 수집과 연락 등의 임무를 은밀히 계속 수행하였다.

1925년 3월 8일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정기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사회를 보고 집행위원 겸 문화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5월 6일 5명의 선진적 청년들과 함께 신사상 연구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농장의 소작인운동 지원을 위한 오륙회(五六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선출된 지 보름 만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았다. 동년 10월 30일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 겸 사회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1주일 만에 이종암(李鍾岩)의 폭탄거사용 자금 모집 활동(경북의열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북경찰부에 붙잡혀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1926년 10월 18일 보석 출감하였고, 같은 해 11월 2일 예심종결 때 면소(免訴) 결정되었다.

1927년 5월 소수의 일본인 지주에게는 득이 되지만 다수 군민에게는 손해를 끼칠 밀양군청 이전(移轉) 반대 대책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9일에는 밀양공립농잠학교 1·2학년생 전원이 동맹휴학에 돌입하자 교섭위원이 되어 학교 당국을 상대로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19일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가 창립될 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1930년 3월까지 회장 황상규(黃尙奎)와 함께 활동하였다. 이즈음 본부대회 출석대표, 신간회 경남도연합회 결성을 위한 밀양지회 대표로 활동하는 한편, 1930년 4월부터 1931년까지는 지회 검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7월 밀양청년회 해체와 더불어 창립된 밀양청년동맹(密陽靑年同盟)도 지도하는 등 ‘밀양청년운동의 대부(代父)’로 여겨졌다. 1938년 12월부터는 『동아일보』 밀양지국 기자가 되어 일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경남지부 산하의 밀양지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동년 10월 11일 일제하의 군수와 경찰서장을 감금하고 각 행정기관을 접수하였으며, 동월 21일 밀양극장에서 밀양인민위원회(密陽人民委員會) 결성식이 개최되었을 때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1946년 4월 좌익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미군정 당국에 붙잡혔다 풀려난 후 1947년 1월 16일 타계하였다. 사후에 동지들이 다음과 같은 추도가를 지어 불렀다.

“검은 무덤은 바람에 스치고

찌들은 묘목은 달 아래 떨어도

그대는 지상의 별.

피어린 고난과 왜적의 칼 아래

한 번도 굴함이 없이

굳세게 스러진 혁명의 투사여.”

묘소는 밀양읍 지동(芝洞)의 산록에 조성되었다가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참고문헌|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 「조선총독부 관보」 제405호, 1913.12.4 ; 「판결문」(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1919.4.14) ; 「刑公 제254~257호 판결문」, 1921 ; 『동아일보』, 『매일신보』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1집,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7권, 1975 ; 강만길 편, 『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 김영범, 『혁명과 의열』, 경인문화사, 2010 ; 김영범,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 손정태, 『밀양의 항일독립운동가』,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 김병환의 의열단 활동 관련 보도(『신한민보』, 1926.12.9)
  • 김병환의 집터(경남 밀양)[출판x, 웹사전 게시용]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6.21)[출판x, 웹사전 게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