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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복한 金福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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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복한
한자명 金福漢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자 : 원오(元吾), 호 : 지산(志山)
출신지 충청남도 홍성(洪城)
생몰년월일 1860. 7. 24 ~ 1924. 3. 29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홍주의병
관련 사건 을미사변, 단발령, 을사늑약, 제1차 유림단운동
주요 활동 1894년 우부승지 사직 낙향,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직후 홍주의병, 1905년 을사늑약 반대상소, 1906년 홍주의병 지원, 1919년 파리장서운동 주도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860년 7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洪州郡) 조휘곡(현 충남 홍성군 갈산면 소향리 조실)에서 부친 봉진(鳳鎭)과 모친 연안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元吾), 호는 지산(志山)이며, 본관은 안동(安東), 당색은 노론이다.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의 12대손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우의정의 직임을 띠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 강화도에 피란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였다. 척화파의 거두였던 김상헌(호 ; 淸陰)이 김상용의 친동생이니, 이들의 절의정신과 척화정신은 후손에 의병 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집안은 대대로 혁혁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개인적으로 불운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6세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1년도 채 안되어 모친마저 잃었다. 12세 때인 1871년부터는 예산군 덕산면의 송애에 거주하던 이돈필(李敦弼)의 문하에 들어가 내종형 이설(李偰)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 후 이설과는 관직에 앞뒤를 다투며 나갔으며, 홍주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동지가 되기도 하였다.

관직에 진출한 것은 31세 때인 1890년 9월 음직으로 선릉참봉에 제수되면서부터이다. 1892년 2월 문과 특별시인 경시(慶試)에 병과에 급제하였다. 1893년 2월에 홍문관부교리, 5월에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7월에 홍문관수찬, 9월에 홍문관 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시강원 사서, 통례원 상례 겸 시강원 사서지제교 등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형조 참의, 부호군, 성균관 대사성 등을 차례로 제수받았다. 1894년 3월에는 우부승지에 올라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해 6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동안 왕세자와 왕에게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한 통치 철학을 강론하여, 왕정을 굳건히 하고 나아가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장과 이념이 조정에서는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어졌음을 절감하게 됨에 따라, 조정에 남아 국록을 축내는 것을 국가의 죄인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낙향하여 다른 방도를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낙향하자마자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는 갑오변란(甲午變亂) 소식을 접하였다. 이 사건을 국망의 시초로 여겨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5년 8월 을미사변과 11월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무력 투쟁의 노선을 택하여 반개화 반침략의 의병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단발령 공포 직후, 홍주 지역 유생들과 잦은 접촉을 하였다. 마침 홍주와 청양(靑陽)의 안창식(安昌植)과 박창로(朴昌魯) 등 선비들이 1894년 여름부터 의병 봉기를 계획해왔었기 때문에, 거의 선포는 곧 군사 활동에 옮겨질 수 있었다. 이설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을 요청하였으며, 홍주부(洪州府) 전영장 홍건(洪建)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의병 참여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지산 김복한의 초상화 [판형3]

11월 27일 홍주향교 전교인 안병찬(安炳瓚)과 만나 의병을 일으키자는 뜻을 같이 하였고, 이상린(李相麟)·이봉학(李鳳學) 등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에게도 글을 보내 기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12월 1일 저녁 이봉학과 연락을 취해, 이봉학·이세영(李世榮)·김정하(金正河) 등이 이끄는 정산과 청양의 민병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들어오도록 하여 이승우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거병한 지 3일째 되는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 총수에 추대되었다.

당시 ‘존화복수(尊華復讎)’라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로 하여금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하고 매호에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하도록 하였다. 홍건·안병찬·이상린과 함께 창의소에서 대책을 세우는 한편, 송병직(宋秉稷) 등을 소모장으로 임명하여 의병 모집을 독려 하였다. 또 정제기 등에게는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대흥의 임존산성 수리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지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이승우와의 연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설을 비롯하여 홍건·안병찬·이상린·송병직·임승주(林承周) 등 22명과 함께 이승우에 의해 구금되었다. 홍주부는 서울에서 내려 온 친위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친위대는 신우균이 이끄는 1개 중대로 250여 명에 달했다. 12월 7일 신우균의 취조를 받고 홍주부에 수감되었으며, 12월 30일 칼을 쓰고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던 중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서 되돌아와 홍주감옥에 재구금되었다. 이후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1896년 1월 17일 서울로 재압송되어 유배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날 자정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김복한 의병장 통문(1895) [판형2]

출옥 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향음례를 실시하고 향약을 베풀면서 주자학 보급에 주력하였다. 5월에는 성균관장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상소를 통하여 ‘전장문물’을 바로잡고 일제의 침략 무리와 개화파 역당들을 물리칠 것을 주청하였다. 다음해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98년 3월 인근 유생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향회를 실시하였으며, 이해 9월과 1899년 4월에는 주자와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모신 보령 남포의 집성당에서 유호근 등 인근의 유생들과 향음례를 개최하였다.

1905년 부인 이씨를 잃는 슬픔을 잊기도 전에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을 들었다. 이설에게 글을 띄워 어찌 한탄만 할 수 있느냐면서 진신(縉紳)의 뜻을 모아 연명소를 올릴 것을 상의하였다. 이에 이설은 진신의 뜻을 모아 상소를 지을 여가가 없다면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며 재촉하였다. 병든 몸을 이끌고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5적을 처벌할 것과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왕실을 회복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올린 지 이틀만인 12월 29일 일본 헌병과 순사들에 의해 붙잡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다음 날 고문관 와타나베(渡邊)의 공초를 받았으나, 의리의 정신으로 상소를 올렸음을 밝혔다.

12월 그믐날 풀려나 홍주로 내려가서는 안병찬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독려하였다. 안병찬을 중심으로 홍주 지역 인사들은 민종식(閔宗植)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1906년 3월 예산(禮山)의 광시장터에서 의병의 기치를 올렸다. 이들은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5월 31일 새벽 일본군의 기습으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성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이남규(李南珪)의 도움으로 재기를 꾀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일본군에 붙잡혔다.

『지산집』 [판형2]

공주감옥에 구금되었다가 11월 서울 경무청으로 이송되었다. 그해 11월 말 풀려났으나, 1907년 10월 13일 보령군의 순사보조원 2인과 순검 1인에 의해 또다시 붙잡혀 보령군의 관노청에 구금되었다. 죄명은 ‘민심 선동죄’였다. 공주감옥으로 이송당하던 도중 조현에 이르러서는 순사보조원 2인이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며 구타하고 총을 쏘며 위협하였는데, 순검 정원조가 총대를 밀쳐 탄환이 빗나가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10월 22일 풀려나서 12월에는 홍주군 결성면 산수동으로 이거하여 자정(自靖)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의 일로 인해 중풍에 걸려 밥을 먹고 책을 넘기는 일도 어렵게 되었다. 1910년 8월 국망의 소식을 접하고는 죄인을 자처하여 음식을 거부하고 모든 가사는 장자인 은동(殷東)에게 맡기고 손님도 접견하지 않았다.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홍주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에는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강화회의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하였다. 장서를 작성한 후 임한주(林翰周)를 비롯하여 의병 동지였던 안병찬 등의 서명을 받았다. 이어서 김덕진(金德鎭)·임한주, 홍성의 최중식(崔仲軾)·전양진(田穰鎭)·이길성(李吉性)·전석윤(全錫允), 서산의 김상무(金商武)·김봉제(金鳳濟), 보령의 백관형(白觀亨)·유호근(柳浩根)·전병식·신직선(申稷善)·김지정(金智貞), 논산의 이내수(李來修), 부여의 김학진(金鶴鎭) 등 1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그러고는 제자인 황일성·이영규·전용학 등을 서울로 보내 제자 임경호(林敬鎬)와 협의하여 파리로 장서를 보내고자 하는 장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창숙(金昌淑)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생들도 곽종석을 수반으로 하여 같은 장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전국의 유림과 연락을 취하던 중에 임경호와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계획과 목적이 같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양 지역 유림의 장서 운동은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장서의 내용을 비교 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영남본의 뜻이 간명하다 하여, 김창숙이 영남본을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서명 순서는 곽종석을 첫째로 하고, 그 다음에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장서사건은 송준필(宋浚弼)의 자제인 송회근(宋晦根)이 4월초 성주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됨으로써 일제 경찰에 탐지되었다. 이어서 곽종석 등이 붙잡혔고, 그해 8월 공주감옥에 구금되었다. 구속되기 전인 7월 대구감옥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7월 31일 형이 확정되었다. 8월 6일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속되었다가 12월에 출옥한 뒤에는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인지서재를 짓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과정을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또 주위의 사우들에게 유교의 진작을 통하여 ‘내수(內修)의 장책(長策)’을 마련할 것을 권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설립된 것이 1920년 5월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였다.

저술로는 『지산집(志山集)』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참고문헌|

김복한, 『지산집志山集』 ;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 김상기, 「1895-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 논총』, 지식산업사, 1990 ; 김상기, 「김복한의 학통과 사상」, 「한국사연구』 88, 한국사연구회, 1995 ; 김상기, 「김복한의 홍주의병과 파리장서운동」, 『대동문화연구』 3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1 ; 김상기, 「한말 일제하 홍성지역 유림의 형성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31, 한국근현대사학회, 2004 ; 김상기, 「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과 ‘호서본’의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73, 한국근현대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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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복한 의병장 통문(1895)
  • 김복한 서한[도서출판 활용x, 웹사전 게시용]
  • 『지산집』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7.29)[도서출판 활용x, 웹사전 게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