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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봉성 金鳳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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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봉성
한자명 金鳳性
본 관  
이 명 김봉성(金鳳成)
출신지 평안남도 강서(江西)
생몰년월일 1901. 3. 3 ~ 1945. 12. 1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신성학교, 흥사단, 수양동우회
관련 사건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 만세시위 주도, 1931년 흥사단 입단, 1933년 수양동우회 가입,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2005)

1901년 3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동진면(東津面) 고일리(古逸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김봉성(金鳳成)을 사용하기도 했다. 안창호의 조카사위이자, 1952년 서울특별시 여자경찰서장을 역임했던 안맥결의 남편이다. 1919년 신성중학교 3학년 재학 중,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기독교인, 천도교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 양전백(梁甸伯) 목사는 2월부터 3·1운동 준비 과정에 참여하였다. 3월 1일 양 목사가 태화관 독립선언에 참여하자, 만세 시위의 실무는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하였다. 2월 28일 교사 김지웅(金志雄)은 학생들과 독립선언식 때 배포할 각종 문건과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김지웅에게 독립선언서 등사를 부탁받고 이에 찬동하여 만세 운동 준비 과정에 참여하였다.

김봉성과 안맥결의 결혼식 초청장(1934.2.20) [판형2]

3월 1일 12시, 신성학교 집회당에 교사와 학생들이 모였고, 교사 홍성익(洪成益)의 ‘한국 독립’에 대한 연설이 끝나자, 교사와 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선천읍 시내로 향했다.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도 합류했으며, 12시 30분경 읍내 중앙에 이르러, 학생 150~160명과 시민 300~400명을 합해 500~60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만세 행진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깃발을 앞세우고 진행됐으며, 사람이 점차 늘어나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선천군청, 선천경찰서 등으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으나, 선천철도원호대(宣川鐵道援護隊)의 착검 공격에 맨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일본 군인과 경찰의 공격으로 시위대는 흩어졌고, 이날 시위로 75명이 체포되고, 12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일로 일제에 붙잡혀 1919년 6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질타하고 동양평화론을 내세워 죽음으로써 혈전을 통한 독립 쟁취를 역설하며 상고하였으나,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뒤 1922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했고, 1927년에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1월 시카고에서 흥사단에 입단하여 통상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8월 귀국하여, 9월 수양동우회 선천지부에 가입했고 11월부터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로 일했다.

1934년 안창호의 조카인 안맥결과 결혼하였고, 선천회관 운영을 책임졌다. 1936년 수양동우회가 관여하는 점진학교 교사로 청소년의 민족의식 함양에 힘쓰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선고되었으나, 1941년 11월 상고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임광순⋮

|참고문헌|

「판결문」, 고등법원 형사부, 1919.7.12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40.8.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1972 ; 박광종,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민족사랑』, 2019년 5월호.
  • 김봉성과 안맥결의 결혼식 초청장(1934.2.20)
  • 김봉성의 흥사단 입단급과 관련한 편지[출판X, 웹사전 게시용]
  • 판결문(고등법원, 1919.7.12)[출판X, 웹사전 게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