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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병욱 金炳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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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병욱
한자명 金炳旭
본 관 김녕(金寧)
이 명 자: 주홍(宙弘), 호: 고담(古潭)
출신지 경상북도 달성(達城)
생몰년월일 1920. 5. 28 ~ 1993. 7. 16
운동계열 문화운동
관련 단체 무우원(無憂園)
관련 사건 비밀결사 무우원 사건
주요 활동 1940년 12월 비밀결사 무우원 경제부장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자는 주홍(宙弘)이고 호는 고담(古潭)이다. 1920년 5월 28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이곡리(梨谷里)에서 아버지 김형두(金炯斗)와 어머니 여강 이씨驪江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1940년 2월 중순 경상남도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에서 승려인 조형길(趙亨吉), 동지 현영만(玄泳晩)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고 항일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 4월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현영만과 대구사범학교 특설강습과에 입학하였다. 이어 이형수(李亨洙) 등 4명을 포섭하고, 그해 12월 1일 대구시 대봉동 소재 이형수의 하숙방에 모여 항일 비밀결사 무우원(無憂園)을 창단하였다. 무원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다.

이들은 불교정신으로 한민족의 정신 강화와 결합을 도모하고, 한국 문학을 연구해 문화 향상에 힘쓰고자 하였다. 특히 무력으로 투쟁하기보다는 유대인처럼 경제력을 길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조직 구성은 집행장 아래 문예·종교·경제·총무부 등을 비롯한 7부를 두었는데, 경제부장에 선임되었다. 12월 9일부터 이틀간 집행장 조형길이 작성한 조직의 취지와 규약 등을 전달받아 달성군 성서면사무소에서 비밀리에 인쇄하여 현영만을 통해 조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이후 “민족정신을 사수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문장연구」, 「글공부」 등의 유인물을 발간하여 동지와 학우들에게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해 여름 일본 도쿄(東京)와 통도사 등지에서 최수원(崔壽源)·강증룡(姜曾龍)·윤석주(尹錫柱) 등이 새로 참여하면서 조직이 확대되었다. 이 무렵 조직으로부터 전달받은 자금으로 소 8마리를 구입하여 달성군 하빈면 농가에 위탁 사육하였다. 1943년 1월 도쿄에 유학한 조형길의 연락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형길과 함께 강증룡의 숙소에서 도쿄지회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비밀 회의를 열고 조직 확대 강화와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접선, 독립운동자금 1,000만 원 모금 등을 논의하였다.

통도사 전경(1930년대) [판형2]

귀국 후 조직 확대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힘을 쏟다가 1943년 6월 조직원 1명의 밀고로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44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고향에 거주하며 1953년 성서면의회 초대의장, 1956년 달성군 참사회부의장, 1957년 대구시의회 의원, 1967년 달성농지개량조합장 등을 역임하고 지방의회와 사회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낙동강 제방 공사 등 대구와 창녕을 포함한 달성군 일원 수리사업에 헌신하였다. 1993년 7월 16일 대구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전병무⋮

|참고문헌|

「김병욱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44. 6.16 ; 서수생, 「愛國志士 古潭 金炳旭 頌德碑」(대구 와룡공원 소재), 1982 ; 정휘창, 『대구 경북 항일독립운동사』, 광복회 대구경북연합회, 1991.
  • 김병욱 프로필 사진
  • 통도사 전경(193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