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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낙영 金洛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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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낙영
한자명 金洛永
본 관  
이 명 김낙영(金洛泳, 金樂永)
출신지 황해도 장연(長淵)
생몰년월일 1899. 7. 23 ~ 1971. 2. 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4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5)

1899년 7월 23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태어났다. 다른 한자 이름으로 김낙영(金樂永)을 사용하였다.

장연군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1일 장연읍 장터에 모인 천도교인 2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면서 시작되었다. 장연읍 장터에서는 다음 장날인 3월 16일에도 300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측 보고에 기록된 만세시위(1919.5.1) [판형3]

4월 들어 장연군의 만세 시위는 본격화되었다. 4월 5일 속달면(速達面) 태탄리(苔灘里), 8일 후남면(候南面) 남호리(南湖里), 11일 장연읍과 남호리, 16일 용연면(龍淵面) 도경리(道景里), 18일 대구면 송천리, 22일 해안면(海安面) 몽금포리(夢金浦里) 등 장연군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대구면 송천리는 1884년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에 의해 한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소래교회(솔내교회)가 세워질 정도로,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었다.

김창현(金昌鉉) 등의 청년과 송천리의 기독교인들과 논의를 통해 송천리 장날인 4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만세 시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18일 김창현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80여 명의 청년과 기독교인을 선도하면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장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경찰들은 시위대에 해산을 종용하였고, 장연 읍내의 경찰과 군인까지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김창현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국제연맹회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체결되고 세계 평화를 주창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유죄판결 하는 것은 만국공법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상고하였으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참고문헌|

「판결문」, 고등법원, 1919.10.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판결문(고등법원, 1919.10.9)[출판x, 웹사전 게시용]
  • 일제 측 보고에 기록된 만세시위(19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