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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도화 金道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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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도화
한자명 金道和
본 관
이 명
출신지
생몰년월일 1873 ~ 1920. 10. 22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북로군정서
관련 사건 경신참변
주요 활동 북로군정서 통신원, 경신참변 시 순국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920년 사망 당시 47세였으므로 1873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북간도(北間島) 왕칭현(汪淸縣) 스리핑(十里坪)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독립군 지원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왕칭현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조국을 떠나 망명한 서일(徐一)을 비롯한 대종교(大倧敎) 인사들이 의병과 한인 청장년을 모아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곳이다. 중관단은 단원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키고 대종교를 신봉토록 해 실력을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함양토록 하였다. 이후 명칭을 정의단(正義團), 군정회(軍政會), 군정부(軍政府)로 변경했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로 개칭해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이 되었다.

왕칭현에 거주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추진한 북로군정서의 외곽 요원이 되어 군량미 공급과 독립군 막사 또는 간부들의 주택을 건축하는 업무를 하였다. 아울러 본부와 분단, 분단과 분단 간의 통신 연락 업무도 함께 처리하였다. 본격적인 무장 활동을 추진하고자 한 정의단 이후 이미 40대 후반의 나이였기에 독립군 요원으로 참여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왕칭현에 주둔한 대한군정서를 비롯하여 3·1운동 후 간도 전역에서 많은 독립군단이 조직되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며 일제의 주요 기관 파괴와 일본 수뇌들의 처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0년 독립군을 섬멸을 목적으로 서북간도에 대거 일본군을 투입하여 독립군과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였다.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북로군정서가 있는 왕칭현으로 조선군 제19사단 소속의 육군대좌 기무라木村益三가 지휘하는 76연대가 침입하였다. 10월 20일경 왕칭현으로 침입한 조선군 76연대는 독립군들이 떠난 대한군정서 사령부가 있던 추엔밍시앙 덕원리(德源里)의 총재부, 사령부가 있던 서대파(西大坡), 사관연성소가 있던 스리핑을 샅샅이 뒤져 문서와 기물을 꺼내 조사하는 한편, 기지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부근 민가로 가 일반 한인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한 사람씩 독립군과 관계가 있는지 조사하였다.

10월 22일 스리핑에 들어온 일본군들은 사관연성소 바로 옆에 조성된 한인 마을의 남자들을 모두 불러내 한곳에 모았다. 김입법(金立法)·김병우(金秉宇) 등 26명의 남자들과 일본군의 지시대로 마을 광장에 모였다. 이미 첩자에 의해 이들의 직업과 반일 의식이 파악된 터라 일본군의 질문은 묻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었다. 결국 끌려온 모두는 참지 못하고 강하게 반항하다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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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姜德相 編, 『현대사자료』 28(조선 4), みすず書房, 1972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제3권, 原書房, 1977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中國東北地域 韓國獨立運動史』, 集文堂,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