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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병국 金炳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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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병국
한자명 金炳國
본 관  
이 명 김병국(金秉國), 김인식(金仁植), 김용운(金龍雲)
출신지 함경남도 풍산(豊山)
생몰년월일 1894. 1. 20 ~ 미상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독립군비단, 대한국민단, 광정단
관련 사건 함정포리경찰주재소 습격, 운전리경찰관 주재소 습격, 영성리경찰관 주재소 습격
주요 활동 서간도의 대한독립군비단, 대한국민단, 광정단 등의 독립군 중간 간부로 국내진입 유격전을 전개해 함정포리·운전리·영성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많은 전과 올림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09)

1894년 1월 20일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웅이면(熊耳面) 문조평리(文朝坪里)에서 출생하였다. 4남 1년 중 장남이며, 13세부터 약 2년간 서당 교육을 받았다. 이명은 김병국(金秉國), 김인식(金仁植), 김용운(金龍雲)이다.

1920년 11월경 고향을 떠나 서간도 창바이현(長白縣)으로 건너가 재만 독립군단인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입단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은 함경도 출신의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감시가 심한 국내보다는 체계적이고 활동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서간도로 망명해 1919년 5월경 조직한 항일 독립군단이다. 단장은 이희삼이며, 주요 인물은 김동준, 김찬, 이동백 등이다. 창바이현은 수십 개의 협곡을 가진 지역이었다. 따라서 군비단은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본부를 17도구(道溝)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두고, 본부와 통하는 중요 계곡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해 대원들을 배치하였다.

일제 측 문서에 나타난 김병국(1925.4.15) [판형3]

군비단 통신사무국의 국원에 임명되어 본부와 지단, 지단과 지단간의 연락 업무를 수행하였다. 입단한 지 약 10개월이 지난 1921년 9월, 군비단 의용대 제1중대 3소대 1분대 분대장인 김병묵(金秉默)의 인솔하에 9명의 대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이 유격대의 향무부교(餉務副校)의 직책을 맡았다. 9월 16일 본부를 출발해 국내로 잠입한 유격대는 23일 밤, 함남 갑산군(甲山郡) 동인면(同仁面) 신흥리(新興里)에 도착하였다. 야음을 이용해 새벽 2시경 같은 면의 함정포리(含井浦里)로 이동한 유격대는 대원들을 2개조로 나누었다. 분대장 김병묵이 지휘한 1조는 일제의 함정포리경찰관주재소와 영림창을 맡고, 다른 한 조는 면사무소로 침입하도록 작전 계획을 짰다. 두 조는 동시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기습 공격하였다. 주재소로 들어 간 1조는 순간적으로 사격을 가하고 폭탄을 투척해 일경들이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순사부장 고바야시 세이지小林淸治와 한국인 소사 1명을 사살하고, 장총 5정과 권총 1정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주재소와 영림창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 면사무소로 향한 다른 조는 숙직 중인 면서기에게 독립군임을 알려 스스로 군자금 49원을 내도록 해 받아냈다. 작전을 끝낸 유격대는 전원 무사히 창바이현의 본부로 귀대하였다.

통신원으로 입단해 유격대원이 된 후, 이 같이 활발히 국내 진입전을 벌이고 있을 때, 군비단은 좀 더 효율적인 무장 활동을 펼치려고 주변의 독립군단과 통합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음)9월 푸쑹현(撫松縣)에 근거지를 가진 흥업단(興業團)과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만들었다.

대한국민단의 단원이 된 후, 같은 해 11월에는 소대장 김성연(金成淵)이 편성한 유격대에 가담해 국내 진입전을 펼쳤다. 이때도 역시 부교의 직책이었으며, 26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유격대였다. 이들 유격대는 11월 8일 자정, 함남 삼수군(三水郡) 호인면(好仁面) 운전리(雲田里)로 들어와 그곳에 있는 일제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김성연의 지휘를 받은 유격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경찰 토미마쓰富松辨四郞와 아라타新田常太郞를 저격해 물리치고, 자위단원(自衛團員) 10여 명을 항복시킨 후 “대한민족은 곧 독립할 것이다”라는 연설을 한 후 장총 2정과 권총 1정 및 탄약을 전리품으로 수거하였다. 이어 주재소에 방화해 전소시킨 뒤 이번에도 전원 무사히 본부로 귀대하였다.

대한국민단은 이듬해 4월, 안투현(安圖縣) 흥도자(興道子)에 근거지를 가진 대진단(大震團), 그리고 같은 창바이현에 본부를 둔 태극단(太極團)과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성립시켰다. 단장 윤덕보(尹德甫), 부단장 강건(姜健), 총무 이한평 등으로 이루어진 최고지휘부인 총부(總部)를 장백현 17도구 동평덕리에 설치하였다. 이전 단일 독립군단일 때보다는 한층 방대한 관할 지역을 확보하고, 침략자 일제를 상대하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광정단에서는 군사부에 소속되었고, 부장(部長) 바로 아래의 서열인 차장(次長)에 임명되었다.

1922년 9월 하순 군사부장의 명을 받고, 소대장 강남경(姜南京) 등 30여 명으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9월 25일 새벽, 삼수군 호인면 영성리(嶺城里)에 도착해 유격대를 3개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2개 조로 일제의 영성경찰관 주재소를 앞뒤에서 완전 포위한 뒤 순간적인 기습 공격을 가해 근무 중이던 일제 경찰 마쓰이 다카시(松井孝)와 호리우치 소우조堀內宗三·김동정(金東挺) 등을 저격 처단하였다. 민가로 향한 나머지 1개 조는 순사가 되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석윤(李錫潤)의 집과 마을의 제일 부호인 김경조(金瓊祚)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53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주재소의 통신 차단을 위해 전봇대와 전선을 파괴하고 절단한 후 작전을 마치고 본부로 귀대하였다.

1923년 (음)2월부터는 창바이현 14도구에 설치된 지방조직인 제3서(暑)의 경시(警視)에 임명되었다. 지방조직으로 옮겨온 뒤부터는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척결 등에 치중하였다. 그해 9월 친일파들의 집을 돌며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일제의 군경에 의해 붙잡혔다. 당시 아내 주(朱)씨와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함흥지방법원에서 1심, 경성복심법원에서 2심을 거쳐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7년 3월 20일 가석방되어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참고문헌|

「대한독립광정단 및 장백현광복지단조직표」, 1923.2.15 ; 「남만주 일대에서의 불령선인단 조사의 건」, 1924.4.10 ; 「가출옥집행제건보고」, 1937.3.22 ; 재상해일본총영사관,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 ; 『동아일보』, 1925.3.24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8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7, 1973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5, 1973 ; 채영국, 「3·1운동 이후 서간도지역 독립군단 연구」,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 논총』, 1990.
  • 일제 측 문서에 나타난 김병국(1925.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