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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시은 金時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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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시은
한자명 金時殷
본 관 김해(金海)
이 명  
출신지 제주도 신좌(新左)
생몰년월일 1887. 10. 10 ~ 1957. 3. 22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조천단연동맹회, 조천노동단
관련 사건 신좌면 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21일 제주 조천면 만세시위 주도. 1920년 조천단연동맹회 발기인, 1923년 조천노동단 단장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애족장(1990), 대통령표창(1983)

1887년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농산(聾山)이다. 1919년 당시 조천리에 거주하며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1919년 3월 16일 서울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4학년생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하였다. 김장환으로부터 서울의 만세 소식을 들은 김시범(金時範)의 권유로 제주도에서도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7일 김시범, 김장환과 함께 조천리 미밋동산(味毛峙)에서 거사하기로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3월 19일까지 14명을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범의 형으로 제주도에서 명망이 높은 유학자였던 김시우(金時宇)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 신촌리(新村里)와 함덕리(咸德里) 등 인근 마을과도 연락하여 사람들을 시위에 동참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3월 21일 오전 10시경 주도자 및 인근 주민과 서당 학생 등 150여 명과 함께 미밋동산으로 나갔다. 오후 3시 무렵 미밋동산에서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500~600명의 시위 대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제주성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신촌리에서 조천주재소 및 제주경찰서에서 출동한 30여 명의 일제 경찰과 대치하였고, 이 과정에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8일 출옥하였다.

1920년 8월 김진호(金振鎬)·원응조(元膺祚)·김희주(金熙冑) 등과 함께 조천단연동맹회(朝天斷煙同盟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1년에는 1919년 만세 시위로 투옥되었던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미모치(味毛峙,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의미로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으며, 옥고로 인해 사망한 동지의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923년 11월 8일 신좌면 조천리 유지들과 발기한 조천노동단(朝天勞働團)의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5.29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매일신보』 1919.5.1, 1920.8.11 ; 『동아일보』 1920.8.6, 1923.11.18, 1983.8.3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3, 1971 ; 李龍洛, 『三·一運動實錄』, 三·一同志會, 1969 ; 宋光培, 「濟州地方의 三·一運動과 그 후의 抗日運動」, 국민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4 ; 金東栓, 「濟州人의 3·1運動과 그 영향」, 『탐라문화』 16, 1996 ; 제주도지편찬위원회, 『濟州島誌』 제2권, 제주도, 2006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3·1운동(II)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http://jeju.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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