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현 金福鉉 |
한글명 | 김복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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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金福鉉 |
본 관 | 김해(金海) |
이 명 | 金鐵 |
출신지 | 전라남도 나주 |
생몰년월일 | 1890. 10. 7 ~ 1969. 6. 22 |
운동계열 | 3.1운동 |
관련 단체 |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전남 광주 만세시위운동 |
포상훈격(연도) | 애족장(1990) |
1890년 10월 7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나주면(羅州面) 금성리(錦城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다. 1896년 2월 나주에서 이학상(李鶴相) 의병부대의 좌익장(左翼將)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5월 5일 전남 보성(寶城)에서 피살된 김창균(金蒼均)의 아들이다.
1919년 2월 하순, 서울에 가 있던 김필수(金弼秀)목사가 3·1운동 준비 측으로부터 광주(光州)의 만세 시위를 위촉받고 광주에 와서 최흥종(崔興琮)과 만나 논의한 뒤 서울로 돌아갔다. 3월 2일 최흥종과 함께 상경하여 담양 출신 국기열(鞠錡烈)의 주선으로 청량리 근처 산기슭에서 광주 출신 유학생 김범수(金範洙)·정광호(鄭光好)·최정두(崔正斗) 등과 광주 만세 시위를 협의하였는데 여기서 광주 만세 시위의 책임자로 추대되었다.
이후 서울의 만세 시위 상황을 지켜본 후 「독립선언문」, 「동포에 고하는 격문」, 「독립가(獨立歌)」 등을 가지고 광주로 와서 3월 6일 광주군 효천면(孝村面) 양림리(楊林里)의 숭일학교 교사인 김강(金剛)과 상의하였다. 그날 밤 광주군 효촌면 양림리 남궁혁(南宮爀)의 집에서 최병준(崔丙浚)·송흥진(宋興眞)·김태열(金泰烈)·손인식(孫仁植)·강석봉(姜錫峰)·김용규(金容圭)·송흥진(宋興眞)·한길상(韓吉祥) 등과 만나 서울의 만세 시위 상황을 전하며 광주의 만세 시위를 제안하였다. 3월 8일과 9일에 걸쳐 효촌면 향사리(鄕社里) 최한영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최정두와 숭일학교 소유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서·격문·독립가를 수천 매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시장의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서 시민과 학생 등 1,000여 명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동일하게 징역 3년이 선고되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