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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상헌 金尙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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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상헌
한자명 金尙憲
본 관
이 명
출신지 충청남도 천안(天安)
생몰년월일 1893. 7. 8 ~ 1919. 4. 1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 3·1만세운동 참가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93년 7월 8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수신면(修身面) 복다회리(卜多會里)에서 태어났다.

천안군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용두리에 살고 있는 유관순(柳寬順)과 유예도(柳禮道)가 서울에서 온 이후에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조병옥(趙炳玉)의 아버지 조인원(趙仁元)이 중심이 되어 준비하였다. 이때 수신면에 살고 있는 주민 중 김교선(金敎善)·박영학(朴永學)·이순구(李旬求)·한동규(韓東奎)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가담하여 계획하였다. 그들은 3월 하순쯤에 만세 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준비에 착수하여 3월 30일 발산리 마을 뒷산에서 횃불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인근 마을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이 횃불 만세 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되면서 주도자들은 4월 1일 병천 장날을 기하여 아우내 장터에서 연합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주도 인물인 유관순은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 대표와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 운동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는 각지에서 약 3,000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선두에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유관순은 남색 치마에 빨간색 저고리를 입고 장대에 높이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의 맨 앞에 섰다. 유관순의 뒤를 이어 조인원과 유중권, 이소제(李少悌) 부부 다음으로 수신면의 김교선(金敎善) 등과 함께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그러나 아우내 장터의 3·1 만세 운동은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이 완정 무장을 한 채로 경계를 삼엄하게 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시위대를 향해 몇 차례 해산을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응하지 않자 일본 헌병들은 무력 탄압에 나섰다.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렸고, 결국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일제의 무력 탄압에 군중은 일시 흩어졌다. 그러나 김교선 등은 주재소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구금자를 구출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또한 조인원 등은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유중무는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일본군의 총칼에 사망하자 시신을 들쳐업고 주재소로 가서 일제의 폭력 행위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오후 2시쯤 천안에서 지원 나온 일본군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였다. 아우내 장터 시위에서 그와 유관순의 부모 등 19명이 순국하였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을경⋮

|참고문헌|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三·一運動篇 其一』 1,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권,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권,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권,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6권,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권, 1973 ; 『3·1운동편』 현대사자료, 한국학진흥원, 1977 ; 김승학, 『한국독립운동사』, 1957 ;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三·一運動篇 其二』 2, 1977 ;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三·一運動篇 其三』 3, 1977 ; 조병호, 「유관순과 병천장날」, 『신동아』 1969년 3월호 ; 이정은, 『유관순-불굴의 민족혼, 영원한 빛』,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남을 빛낸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2012.
  • 병천 3·1운동 관련 보도(『신한민보』 1919.9.2)[출판X, 웹사전 게시용]
  • 아우내 만세운동 발생지 기념비(충남 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