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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두석 金斗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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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두석
한자명 金斗石
본 관
이 명 호: 정희(貞熙), 창씨명 : 금전두석(金田斗石)
출신지 경상남도 마산(馬山)
생몰년월일 1915. 11. 17 ~ 2004. 1. 7
운동계열 문화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41년 신사참배 거부운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15년 11월 17일 경상남도 마산부 성호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정희(貞熙)이고, 일제 말기 재판받을 때는 금전두석(金田斗石)이라는 이른바 창씨명을 썼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허영이(許永伊)를 따라 마산 문창교회(文昌敎會)에 다녔다.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워 운영하던 마산의 사립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와 동래의 사립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졸업하고, 1934년 3월부터 모교인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 무렵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는 물론 교회와 신도들에게까지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9년 7월 20일 마산경찰서에 불려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면 학교 교사를 그만 두라는 협박을 받고, 그 이튿날 교장으로 있던 호주장로회 선교사 맥래F. J. L. Macrae(孟浩恩)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 후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다가 같은 신사참배 문제로 이미 1938년 9월경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이인재(李仁宰)·최덕지(崔德支) 등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던 한상동(韓相東) 목사의 주선으로 호주 여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40년 4월 평양 여자신학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도 주기철(朱基徹) 목사를 비롯한 신사참배 거부 운동자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같은 해 5월 붙잡혀 28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 귀향했으나, 6월 초 다시 마산경찰서에 소환·구속되어 11월 초에야 풀려났다.

그 후에도 경남 각지 교회를 순회하며 동지들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1941년 5월 15일경부터 11월까지 마산에 살던 호주장로회 선교사 테이트Miss M. G. Tait(太邁施) 집에서 열린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를 위한 수요기도회에 수십 차례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8월경 마산경찰서에 붙잡혔다가 9월 부산 경남도경으로 넘겨져 신문을 받았다. 11월 최성봉(崔聖奉)목사를 비롯한 다른 구속자들과 함께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43년 11월 18일 이술연(李述蓮)·염애나(廉愛拿)·김야모(金也模)·김묘년(金妙年)·김수영(金秀榮)·최달석(崔達碩) 등과 함께 기소되었다.

1944년 9월 1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45년 8월 19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김승태⋮

|참고문헌|

김승태 엮음,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의 증언』, 다산글방, 1993 ; 문창교회100년사』, 한국장로회출판사, 2001 ; 김승태, 『식민권력과 종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 김승태 편역, 『신사참배문제 자료집』 Ⅲ,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